식사 중이시라면 죄송합니다.
흔히들
똥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럽기 때문에 피한다고 한다.
더럽혀질 신발과 한동안 따라다닐 냄새와 찝찝함을
생각한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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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가던 이들이 그렇게 하나 둘 피하다 보니
수분기가 빠지고, 먼지가 앉아
언뜻 보기에는 돌멩이와 구분하기 힘들어지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고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똥은 자신이 돌덩이라도 되는 듯
지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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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은 밟아주어야 스스로 똥인 줄 안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똥을 밟아주는 것이 앞서가는 사람의 미덕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 왔다.
피하기에 급급했던, 앞서 간 이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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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앞서 말한 더럽혀질 신발과 냄새와 찝찝함들이
귀찮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맞서기보다는 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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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는
내적 욕구와 외부의 사회적 요구가 조화를 이루지 않을 때 정신적 질환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 조화는 자아의 대표적인 기능이고,
흔히들 알고 있는 이드. 에고, 슈퍼에고의
에고가 바로 자아이다.
프로이트가 설명한 자아의 여러 가지 기능 중에는
대상관계에 관한 기능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왜? 적을 만들면서 까지 똥을 밞아왔던 것일까?
똥을 밟아 주던 나는 미성숙한 자아를 가졌던 것인가?
똥을 피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자아가 성숙한 것인가?
한 브런치 작가님의 글에서 처럼
내 똥이 상대에게 투영되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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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을 앞에 두고
밟을지 말지,
또는 어떻게 밟을지를 고민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