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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열한백구 Aug 14. 2019

삭발을 하다.

20대 후반쯤이었다.

그동안 모아 오던 증명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사진을 펼쳐놓고 한참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뭐가 이상하지? 뭔가 이상하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이마가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짧은 머리를 고수하고 있었는데

 날 이후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왁스라는 것도 발라보고,

파마라는 것도 해보고,

풍성해 보이고자 별의별 짓을 다 했다.


그러던 내가 삭발을 했다.

이발 시기를 놓쳐 지분하던 참이었는데

여름휴가철이라 동네 미용실이 문을 다 닫아 버려

집에 있던 이발기로 밀어 버렸다.

시원하게 3mm.


십여 년 만의 삭발이라 어색했다.

머리가 반쯤 밀렸을 때쯤 출근이 걱정되었다.

직원들이 쑥덕거릴 것 같다.

왼쪽 이마에 있던 작은 땜빵이 없어졌다.

! 없어진 게 아니고 이마에 속해져 버렸구나.


고등학교 때 집에서 삭발을 하고 다녔다.

영화 '아저씨'의 원빈처럼 거울을 보면

스스로 밀었다. 삭발이 좋아 일부러 그랬거나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고등학교를 나왔다.

매주 금요일 점호시간에는 주말 외박 전 두발 및 복장 점검을 하였는데,

교복을 다려야 했고, 매주 이발을 하여야 했다.

세탁비 천 원, 이발비 천 원


고등학교 2학년 때 IMF가 터졌다.

분식점을 운영하시던 어머니가 무리해서 한식당을 인수 한 참이었다.

외식값을 아끼게 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식당은 맛만 있으면 된다는 어머니의 경영철학은 6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식당은 폐업을 했고, 남편 없이 혼자서 삼 남매 건사하며 일구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산으로 도망을 쳤다.(깊은 산속에 있는 식당으로)


금방 돌아올 줄 알았던 어머니는 오지 않았고,

연락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몇 개월을 보내야 했다.

아무리 조심해도 교복에는 구김이 생겨

기합과 벌점을 받아야 했고, 이발비가 없어

주말이면 집에 있던 이발기로 머리를 밀어야 했다.

(당시에는 특별히 힘들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글을 적다 보니 울컥한다.)

곧 겨울방학이었고, 3학년 초에 바로 승선을 할 생각이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해고를 다녔고, 취업이 곧 승선이다.)


항해사가 되겠다던 아이는 지금 간호사가 되어 있다.

지금도 결핍으로 이루어진 동기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만,

그 당시보다 여유 있음에 감사한다.


삭발을 했다.

이발비가 없어서 삭발을 한 것은 아니다.

막상 밀고 나니 나쁘지 않다.

다만 출근할 때 직장동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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