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수고했다.

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13 / 391.8km

by 한성호

아침부터 안개가 심하게 꼈던 날이다. 사실 여태껏 아침에 안개가 끼지 않았던 날이 없을 정도로 안개가 끼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오늘의 안개는 괜히 느낌이 묘했다.


레베 데 라스 칼사다스 - 카스트로헤리스.png 오늘의 루트


오늘의 일정은 Itero de la vega(이테로 데 라 베가)까지 38.4km를 가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처럼, 긴 거리니까 마음가짐을 38.4km짜리로 다잡으니 괜히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가벼운 발걸음은 나를 27.1km 지점에 있는 Castrojeriz(카스트로헤리스)에 데려다 놓았다.


나는 여태까지 지평선을 본 적이 없다. 아니 보긴 봤으나, 내가 기대하는 지평선이 아니었기에 지평선을 본 적 없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만큼 완벽한 지평선을 본 적은 없는 것이다. 오늘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길을 걷다가 지평선을 마주했지만, 오늘의 지평선 또한 내가 기대하던 지평선이 아니었다. 안개가 자욱한 탓에 뒷 배경이 보이지 않으니, 이게 지평선인지 아닌지 알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희미하게 보이는 실루엣을 통해, 안개가 걷히고 나면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하지만, 느낌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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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가득했던 날

걷는 길 초반에 언덕이 조금 있었다. 언덕을 오르면 오를수록 지평선이 조금씩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안개가 슬슬 걷히며, 구름 뒤에 내내 숨어있던 햇살 또한 조금씩 비치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힘든 것도 아니었고, 걸으며 듣던 노래가 슬펐던 것도 아니다. 그냥, 너무 황홀한 광경을 마주한 느낌이랄까. 글쎄,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뭐 그렇게 황홀한 풍경인가 싶지만, 그땐 기분이 참 이상했다.

눈물 콧물이 너무 흘러서 길가에 보이는 바위에 앉아 잠시 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잠시 쉬고 싶다는 생각보다도, 이 느낌을 붙잡아서, 내 안에 맺혀있는 눈물을 다 쏟아내고, 비워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언덕 꼭대기에 올라,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며 정말 처절하게 울었다. 보는 사람도 없고, 듣는 사람도 없고, 지나가는 차 또한 없으니 쪽팔릴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목청이 터져라 울었다. 아마 밖에서 날 바라보면 그저 그런 ‘똥 폼'일 수도 있겠다만, 그래, ‘똥 폼'이면 어떠랴, 그 ‘똥 폼' 나도 좀 잡아보자 싶은 마음이었다.


IMG_8883.JPG 햇살이 새어 들어오던 하늘의 구멍


분명 황홀경을 마주했던 것이니, 행복이 차올랐을 테고,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일 테다. 그런데 행복의 눈물을 흘리는데, 괜히 지난날들이 생각났다. 나는 그 생각에 더 서글피 울었다.


나는 혹여나 내가 토크쇼에 출연한다면 이야기할 만한 에피소드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단조롭다 생각했던 나의 지난 시간들이었는데, 그 시간들이 문득 다이나믹하게 느껴졌다. 정말 나도 남들 못지않은 다이나믹한 삶을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 나도 에피소드가 많은 사람이다. 글쎄, 남들이 내 생각에 얼마나 동의할진 모르겠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다. 평생 동안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진 못하지만, 그랬던 날들이 분명 있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간 참 고생 많았다고. 무거운 현실의 압박, 수많은 눈초리, 참아 낼 수 없을 만큼 아픈 상처들, 그리고 스스로를 자꾸 갉아먹던 스스로에 대한 의심들까지 이 모든 걸 뚫고 나는 지금 여기 서있는 것이다. 그 길로 내가 여태 여기까지 걸어왔다.


정말 수고 많았다.

정말 고생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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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헤리스의 풍경

오늘의 날 만들어준 나의 모든 길들, 나의 모든 까미노들에게 참 감사하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내가 이만큼 컸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 길들이 소중하다 하여, 그리고 감사한 순간들이라 하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더라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좋았건 싫었건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난 이렇게 한 움큼 또 비워낸다.


너무 건조한 모래알들처럼 바람이 불면 휘 날아가 버릴 것 같이 느껴지던 순간들을 오늘의 눈물로서 다졌다. 그래, 이 길들, 나의 지난 과거들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자꾸 돌아보지 말고, 자꾸 붙잡으려 애쓰지 말자. 그저, 그 길들에 감사하고, 또 다른 까미노를 걸어가자. 이제 진짜 ‘Don’t look back’이다.


IMG_8882.JPG 477.7km 남았다.


나의 모든 길들이, 나의 모든 시간들이 레벨 30, 그러니까 서른 살이 되기 위한 경험치일 뿐이다. 지난날 나의 경험치가 되어주었던 사냥이 즐거웠다해서, 혹은 쉬웠다고 해서 다시 쪼렙 몹들을 때려잡을 순 없다. 이젠, 던전을 옮길 때가 되었다. 더 큰 몹을 잡고 더 많은 경험치를 쌓아 또 열렙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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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헤리스에서 내려다 본 내가 걸어왔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