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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Jun 21. 2022

달팽이 때문에 생각난 '생각'

까미노 데 산티아고 이야기_외전 / Day 2 / 59.3km

    “다시 걸으니까 좋지?”

    이미 피스테라, 묵시아를 혼자 걸어서 다녀왔던 영준이 형님이 내게 물었다.


    “다시 걸으니까 행복해요”


    사실 머리로 생각해서는 내가 행복한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느끼기에는,  지금 정말 행복하다. 당연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행복이라는  뭔가 논리적으로 따질  없는 무언가임이 확실한가 보다.


오늘의 루트


    어제보다는 날씨가 흐렸다. 비가 오는 날씨까지는 아니었지만, 안개가  많았다. 안개라고 얕봤는데, 가랑비에  젖는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을까 숙소에 도착해서 보니 옷이 홀랑  젖어있었다. 우비를 입기엔  애매한 날씨여서 계속 꺼낼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입지 않았었는데, 이럴 거면 처음부터 꺼내 입을  그랬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을 조금 비싼 사립 알베르게로 왔다. 조금  저렴한 공립 알베르게엔 베드 버그가 있다는 리뷰 때문에 이곳으로 오게  것인데, 덕분에 옷을 편히 말릴  있었다. 궂은 날씨 탓에 쌓인 피로감도 따뜻하고 편안한 알베르게 덕분에 금세 날아갔다.


누가 이렇게 신발을 걸어뒀지?


    혼자여서 그런가 괜히 주변의 다양한 것들에게 시선이 자꾸만 간다.


    걷는데 자꾸만 나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길래 올려다보니 딱따구리가 있었다. 내가 딱따구리의 존재를 안다는 것은, 분명 어디선가 (어릴    동물원이라던가)  적이 있는 것일 텐데, 딱따구리의 울음소리, 아니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낯설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인듯했다. 어쩜 저리도 머리를 빠르게 움직   있지?

    또 이곳 자체가 안개가 자주 끼고 습한 동네라 그런가 길바닥에 이상하게 생긴 달팽이들도 참 많았다. 미끄러져 가는 모습을 보고 달팽이라고 이야기했을 뿐, 내가 알고 있는 달팽이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긴 했다. 스케일이 다른 크기. 내 손가락만 한 크기에, 아주 새까만 색을 하고 있는 달팽이였는데, 이런 친구들이 너무 많아, 밟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걸어야 했다.

    딱따구리에 한참 빠져서 나무를 올려다보느라, 그리고 달팽이들을 피해 걷느라 나의 시간을 즐기는 데에 집중을 하지 못한 기분도 들지만, 다행히도 이곳의 시간은 정말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  희한하다. 분명 함께 걷는 사람들과 왁지지껄 떠들며 걸을 때는 ‘벌써 3시야?’, 혹은 ‘벌써 이만큼이나 걸었어?’했던 순간이  많았는데, 이젠 반대로 ‘아직 12시밖에  됐어?’, ‘아직 이만큼 밖에  걸었어?’하는 순간이  많다. 좋게 생각해보자면, 지금  순간을  알뜰하게  향유하고 있나 보다. 괜스레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사실이 만족스럽다.


날 깜짝 놀라게 했던 부엉이




    다시 걸어서 행복하고,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만족스럽긴 하지만

    생각이 많아지는 습관 때문에, 아직은 조금 힘들다.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이렇게나 천천히 걷는  모습이 오늘 길에서 만난 달팽이와 닮아 있음을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달팽이> 가사를 들어보면 “언젠가  훗날에  넓고 거칠을 세상  바다로  거라고라는 가사가 나온다. 그래, 솔직히 끼워 맞췄다는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렇게 가사 속의 달팽이도 세상  바다를 향해 가고 있고, 나도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피스테라를 보러 가고 있으니 달팽이와 나는 닮았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가사 속의 달팽이가 말하는 바다는 진짜 바다가 아닌 비유적인 표현일 테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서 바다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향해 걷고 있는 걸까? 포기하지 않고 부지런히 가고 있기는 하니까,  부분은 정말 칭찬해줄 만하다. 그런데, 목적지 그러니까 뚜렷한 목표의식의 부재가 문득 아쉽게 느껴진다.


    나는 왜 이 여행을 시작했지?

    얻고 싶은 게 뭐지?

    아, 또다시 ‘왜'의 굴레에 이렇게 빠지는 건가?


오늘 만난 풍경들

    내일부터는 피스테라-묵시아 루트의 하이라이트 구간이 시작된다. 예쁜 구경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잠을 청해 본다. 그래, 막 어떤 생각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일단 눈으로 보고 즐기자.

    생각해봐야 생각에 잠기기만 할 뿐, 결국에는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민거리가 있을 때, 그 고민을 암만 해봐야 결국에 그 일이 해결되는 건 나의 생각 덕분이 아니라, 시간 덕분이다. 그러니 생각을 좀 줄일 필요가 있겠다.

    가끔 책을 읽다 보면, 이 이야기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분석하고 생각하며 보느라, 재밌는 이야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분석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즐기다 보면 ‘참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싶은 생각이 들며 만족스럽게 책을 읽을 때가 있다. 그러니 나도 마찬가지로 생각을 좀 줄이고, 그저 눈에 보이는 것들만 믿고 따르며 즐겨야겠다.


    그래 눈호강 먼저다.

    내일은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가자 피스테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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