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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Jun 20. 2022

혼자 하는 수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이야기_외전 / Day 1 / 24.6km

    오랜만에 발걸음을 떼고 나니, 시작부터 더 멀리까지 나아가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피스테라와 묵시아를 넘어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지만) 포르투갈 길도 걷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건 상황을 좀 봐야겠다. 잊고 있었던 무비자 기간도 걸리고, 무엇보다 코로나 사태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니 말이다. 우선,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에 집중하고,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오고 나면, 그때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아무튼, 다시 걷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시작의 한걸음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힘을 느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결국 다시 또 한 걸음 한걸음, 느릿느릿 피스테라와 묵시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늘의 루트


    피스테라로 향하는 길에 만나는 첫 번째 마을은 네그레이아라는 마을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부터, 네그레이아까지의 길은 평지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길이 언덕과 내리막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말인 즉, 산길을 걸었다는 이야기다. 그 때문일까, 글이 참 예뻤다. 걷는 내내 예쁜 풍경에 둘러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예쁜 풍경 속에 나 혼자 있었다. 글쎄,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누고, 그렇게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는 일이 줄어들어서일까,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도 많아지고, 그만큼 나를 둘러싼 풍경이 괜스레 새롭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한적해서 좋았다. 마치 까미노의 첫 코스였던 생장에서부터 론세스바예스까지의 그 구간을 다시 걷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도 오늘처럼 참 고요했던 기억이 난다. 도시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한적한 시골길을 걷는 기분. 그 기분을 또 오랜만에 느껴보게 되었다. 물론 오늘 또한 다른 까미노의 첫날이라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무척이나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생각이 많이 드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또 비교해보며 괜스레 피식피식 잰 웃음이 많이 새어 나오는 오늘이었다.


가자 피스테라까지


    혼자 걷는 길은 나름 즐겁다. 걸으며 나를 지나친 인연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무슨 에피소드가 있었더라 하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게 즐거웠다. 비록 이런 생각을 한 만큼 오래된 기억은 아니지만,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다 보면 괜스레 ‘그땐 그랬지'하며 아빠미소가 새어 나온다. 물론 모든 순간을 다 기억할 순 없다. 그러니 소중한 순간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조금 노력이 필요하겠다. 이렇게나 아빠미소를 짓게 만드는 행복한 기억들인데, 이 추억들이 전부 나의 재산이 될 텐데, 이걸 잃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아깝다. 그러니 오늘처럼 지난날을 가끔 떠올리며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겠다. (지금 이렇게 글로써 다시 한번 그날의 기분을 정리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의 되새김질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걷는 일이 좋게 느껴졌던 가장 큰 이유는 정말 오랜만에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 ‘한성호(본인)’을 만난 일이다. 예전처럼 깊이 있는 질문들로 문답하며 사색에 빠진다거나 했던 것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내 안에 있는 ‘나'와 수다를 실컷 떨었다. 아무도 없으니 혼잣말도 참 많이 했던 하루다. 충분히 쓸데없고, 충분히 유쾌한 혼잣말들로 하루를 채우며, 참 즐겁게 걸었던 하루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풍경


    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리해서 느리게 걷지도 않을 것이고, 무리해서 빠르게 걷지도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보속, 내가 설정하고 기대하는 보속에 맞추어 걷는 일을 잠시 내려놓고, 나만의 보속 그대로, 나의 보폭 그대로 걷기로 결심했다. 애플 워치를 차고 걷는 바람에 자동적으로 내가 어느 정도의 속도로 걷고 있는지 전부 들켜버리고, 그게 가끔가다 신경 쓰이긴 하지만, 최대한 나만의 보속 그대로 걸을 것이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말이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건다면 깊은 유대를 쌓으려 노력한다거나, 혹은 반대로 벽을 만들어 그들을 차단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대화하고 싶은 만큼만 대화하고, 연을 유지하고 싶은 만큼만 노력할 것이다. 누군가 맥주를 권하면 마시고 싶은 만큼만 마실 것이고, 나눠주고 싶은 만큼만 나눠 줄 것이다. 이렇게 나는 나를 사랑하는 것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라 이런 일이 굉장히 낯설고, 어렵게 느껴진다. 나를 빼놓고 다른 사람들끼리만 대화를 하고 있으면, 나를 왕따라고 생각하진 않을까 하며 억지로 대화에 참여하려 한다. 그리고 반대로 대화에 빠지고 싶을 때도, 내가 빠지면 무례하다고 생각하려나 하며 억지웃음을 짓고 대화를 이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보다 쾌적한 나의 삶을 위해 이런 ‘억지로'를 억지로라도 억제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혼자로서도 충분하다.

    혼자서도 예쁜 풍경을 볼 수 있고, 혼잣말로 수다를 떠는 일도 무척이나 즐겁다.

    그러니 혼자여도 괜찮다.

    눈치 볼 필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을 일찍 자야겠다.

    오늘은 일찍 잠들고 싶으니까 말이다.


    마침 와이파이도 잘 되지 않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 적이다. 산티아고부터 이곳까지 그렇게 멀지 않았던 탓에, 금방 도착해서 책을 읽기도 하고, 개인 시간도 충분히 보냈다. 그러니 오늘 하루는 충만하다. 더 충만한 하루를 만들기 위해 억지로 잠이 쏟아지는 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한적한 시골마을의 풍경


    아, 이상한 경험 이야기 하나를 가볍게 덧붙이고 싶다.

너는 누구니?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잠시 바깥 바람을 쐬러 나갔다 왔는데, 그 와중에 한 고양이를 만났다. 그런데 이 고양이가 주는 느낌이 참 묘했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이렇게나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고양이를 본 적이 없다. 물론, 이 알베르게에 머물며 사람 손을 많이 탄 탓이겠지만, 이렇게나 친근한 느낌이 들었던 건 처음이다. 마치 나를 아는 사람이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내게 친근함을 표시했다. 계속해서 나를 따라왔고, 계속해서 내가 놀아주기를 바라던 고양이. 이 고양이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밖에 날씨가 꽤 춥던데, 고양이를 밖에 혼자 두고 자려니 맘이 꽤 불편하다.


    아무튼,

    잔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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