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 이야기_외전 / Day 4 / 132km
포르투갈 길을 다음으로 기약한다. 더 걷고 싶고, 걸을 수 있는 컨디션이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다간 정말 낙동강 오리알이 될 것 같으니, 조금 더 능동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겠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나라들이 폐쇄를 선언하고 있으니, 떠돌이인 내게는 선택권이 많지 않다. 정작 코로나를 피해 다니는 꼴이기야 하지만 이번에는 코로나보다 앞서서, 선수를 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솔직히 오늘이 정말 끝 중의 끝, 마지막 날인데,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오는 길의 절반 이상이 아름다운 바다와 함께하는 길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피스테라, 묵시아 길도 꼭 걸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구나 하면서 깨달을 수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을 구경하는 것은 잠시뿐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유럽발 미국행 비행기가 제한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나의 다음 목적지는 미국이었고, 나는 지금 유럽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마 오늘 하루 종일 가장 많이 한 말이 “자, 그럼 이제 어떡하지?”였을 정도다. 이러나저러나 시시각각 변하는 각국의 제한 사항들 때문에, 계획이 의미가 없는 수준이지만, 걸으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획들을 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바라는 건 단순하다. 4월 17일 미국에서 친구와 함께 여행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는 것. 여행기간을 1년을 채우는 것. 아 혹시나 욕심을 내자면 1만 시간을 채우는 것까지. 이렇게 두 가지, 그러니까 세 가지뿐인데, 코로나라는 장애물이 참 크다. 다시 이야기 하지만, 그래도 나름 까미노의 마지막 날인데, 이런 이야기로 일기가 가득 차는 일 또한 참 싫다.
하지만 최대한 솔직한 내 이야기와 생각들을 적기로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겠지. 없는 이야기를 마지막이랍시고 막 지어낼 순 없으니까. 그래, 굳이 굳이 끼워 맞춰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지금 세상의 끝에서, 그리고 나의 까미노의 끝에서, 다음을 생각해야 하는 이 모습이, 어제 이야기했던 과정의 연속 속에 있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덕분에 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차분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벗어날 수 없는 비극을 마주한 그리스 희곡의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되었다. 나는 이런 비극을 맞이하면 차분해지는 스타일이구나. 내가 나의 모습을 바깥에서 볼 수는 없지만, 까미노를 걸으며 물집이 너무 아파서 미칠 것 같았던 며칠을 빼고 나는 늘 통통 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절대 아니다. 아마 오늘은 전의를 상실한 군인의 모습이었지 않을까.
아무튼, 마지막 피날레가 코로나에 대한 이야기로 장식되어서 기분이 나쁘지만,
그래. 결국엔 끝났다.
결국 내가 다 걸어냈다. 800km, 그리고 + a까지. 이런저런 이유들로 성취감의 쾌감은 덜 하지만, 묵시아의 마지막 0km 마일스톤을 보고는 “미친 새끼, 결국 다 하긴 하네”라고 혼잣말을 할 정도였으니 뭐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든 게 아닐까?
걷기 전과 후, 달라진 게 체감되는 바는 별로 없다. 아, 다리는 좀 튼튼해졌다. 평소에 가끔 걷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갑자기 바운스를 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런 건 확실히 좀 덜해졌다. 하지만 그런 것 말고 정신적으로, 내면적으로 성장했는지는 아직까지 체감되는 바가 없다. 이 까미노를 통해 아마 나는 그저 원석을 캐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보면 까미노의 추억들이 나의 일상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제련되고, 그게 빛을 발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볼 뿐이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괜히 이곳에 소감을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소감을 밝힐 땐 고마운 사람들을 언급하는 게 나름 국룰이니까, 길 위에서 함께 해준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자 이름을 나열해 본다.
욱희 성준이 지영이 형, 형석이, 루까 아저씨, 디에고 아저씨, 요한네스, 제니 웨이 누나, 나탈리아, 루돌프 아저씨, 페기 아줌마, 라므코 선생님, 프란치스코 선생님, 브라이언, 프랭크, 아셸, 라치카 누나, 라울, 종우, 엘손, 클라우즈, 숙인이, 안나, 제레미, 정연이, 영준이 형님, 페리 선생님, 란, 밀란, 안드레아, 가브리엘라 아줌마, 막시모, 델레이니, 마리아, 안드레스 선생님과 그 와이프분, 클라라 선생님 오스카, 데미아노, 그리고 오픈 채팅방에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주셨던(한 번도 뵙지는 못한) 정삼이 형님까지.
나는 이들 모두를 기억하고 싶다.
<원피스>라는 애니메이션을 보면, 주인공들이 찾으려고 하는 ‘원피스'안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우스개로 그 보물이 혹시나 여태 동안 보물을 찾아 헤매며 생긴 추억들 자체가 보물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정말 뻔하디 뻔한 결말이다. 그런데 그 뻔한 결말이 나는 조금 이해가 간다. 함께한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그 사람들과 함께 만든 추억들이 보물이라고 느껴진다. 정말이다. 다른 날짜에 시작했으면 또 다른 사람들과 이런 유대를 만들었을 테지만, ‘설마 이 정도로 깊은 유대를 만들 수 있었을까?’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함께했던 모든 사람들이 소중하다. ‘같이'의 가치가 이런 것이라는 걸 마음속 깊숙이 깨닫는다.
이들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티셔츠 한 장을 롤링페이퍼 삼아 사람들의 글귀를 담았다. 그들에게 나에게 하는 말도 좋고, 본인에게 하는 말도 좋고, 뭐든 본인의 언어로 한마디를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영국에서 오신, 까미노를 6번째 걷고 계신 페이 선생님께서 써주신 글귀가 자꾸만 생각난다.
‘네가 까미노를 떠날지라도, 까미노는 날 떠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일정에 따라 흩어질 테지만, 서로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게 꼭 사람이라는 대상이 아니어도, 까미노에서 얻은 추억들, 그리고 수많은 깨달음들이 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살면서 종종 그 추억들과 깨달음들이 생각날 테지. 이렇게 까미노는 나를 떠나지 않을 건가 보다.
그렇다면, 영원히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다른 의미로 Buen Camino를 외쳐야겠다.
Camino가 단순히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나의 길, 그리고 우리의 길을 의미하는 바로 외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