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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May 17. 2020

혹 아무 꿈_Phnompenh, Cambodia

여권 다 써서 재발급받기

프놈펜으로 오는 길에 ‘껩’에 잠시 머물렀다. 껩은 캄폿에 거점을 두고 오토바이로 왕복하며 여행하기로 유명하다던데, 내가 갔을 땐 캄폿부터 껩까지 공사 중인 구간이 많아서 위험해 보였다. 대신 캄폿에서 프놈펜으로 이동하면서 잠시 들러볼 수 있게 되었다.


껩에서 잠시 트레킹을 하고, 바닷가 구경도 했다. 한국에서는 산이라 하면 질색하며 거들떠도 안 보던 내가 여행을 하며 트레킹을 일상처럼 여기고 있다. 만일 한국에 가게 된다면 한국에 있는 산들도 많이 가봐야겠다. 함께 여행 중인 폴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한국의 자연을 소개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우니 말이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프놈펜의 시간들


돌이켜보니 숨 찰 정도로 빠르게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어느새 프놈펜에서 킬링필드와 뚜올슬랭 수용소를 전부 둘러보고 벌써 다음 나라, 베트남에 입국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번 베트남 여행은 긴 기간을 예상하고 있어서 따로 비자 발급을 필요로 했다. 덕분에 비자가 나올 때까지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프놈펜에서는 할 거리가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녀올만한 곳은 전부 다녀왔고 마땅히 관심이 가는 곳도 더 이상 없었다. 영화 <킬링필드>를 봤던 독립영화관에서 다른 영화도 상영해 주길래 다시 방문해 볼까 했지만, 그냥 근처 카페에서 글을 쓰거나 숙소에서 쉬고 말았다.


프놈펜에서의 한량놀음


결국 또 새로운 베트남 비자를 여권에 붙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인도네시아에서 근무하셔서 매 방학 때마다 인도네시아를 방문하던 때가 있었다. 처음 내 이름으로 된 여권이 생기던 그때부터다. 괜히 여권을 입출국 도장으로 가득 채워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나의 이 역마살은 아마 그때부터 시작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권을 채우기 위해서 무리한 여행을 계획하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 작은 꿈을 이루려 노력해본 적이 없다. 많은 여행을 상상하며 페이지까지 추가해서 만든 내 여권은 한두 번 도장이 찍히고 폐기되었다. 여태까지의 나는 여행을 많이 다니지 않는 사람이었다. 여행이란 건 꽤나 많은 조건을 요구했다. 돈, 시간, 자신감, 독립심 같은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그 당신의 내게 여행이란 큰 맘을 먹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권이 더럽혀지기를 소망하는 아이러니


그래도 이번엔 하나 둘 여권의 페이지를 소비하고 있어서 기분 좋다. 도장보단 비자를 붙이는 걸로 페이지를 소비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괜히 감회가 새롭다. 이제는 괜히 여행을 즐기고, 여행을 자주 다녀서 여행이 아무것도 아닌척하는 이상한 콘셉트를 잡는다. 쿨 해 보이려고 여권 케이스도 버렸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내가 얼마나 진정으로 여행을 즐기는지, 내가 얼마나 쿨한지는 잘 모르겠다.

과거야 어땠든 간에, 다시 꿈을 이루기 위해 달리고 있다. 여권을 입출국 도장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국경을 넘어 다니고 있다. 이번에는 페이지가 모자라서 여권을 재발급받을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전깃줄




여행이 일상이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 좋은 쪽이 아니라 조금 부정적인 뜻으로 말이다. 여행 못 가는 사람도 많은데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람 욕심이 정말 끝이 없는 건지, 분명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음에도 지겹고 무료하다. 여행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굳이 자극적인 걸 보고 새로운 것들을 체험해야만 경험이 되는 건 아닐 것이라고, 반복되는 하루로부터 오는 무료함, 지루함, 다른 부정적인 모든 것들 또한 나를 채워주는 경험이 될 거라고 믿으며 그저 자위해본다.


프놈펜의 해질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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