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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Jun 29. 2021

시베리아횡단 열차_하루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의 첫날 밤의 기록

    드디어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티켓

    지금 이 여행을 계획하며 '여행 속 여행'이라는 명목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해봤었다. 당연히 첫 번째로는 스페인 순례길이다. 사실 이 스페인 순례길 때문에 이 여행이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베트남에서의 생활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리프레쉬의 시간을 갖고자 스페인 순례길을 걷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그러다 문득 조금 더 시간적 여유와 자유가 생기니, '스페인까지 여행을 하며 가볼까?' 하는 생각으로 여러 나라들을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게 더불어 '비행기를 타지 않고 스페인까지 가보자'하는 스스로에게 주는 도전과제까지 부여하여 지금 이곳까지 와있다.

    두 번째론 '베트남 오토바이 종주'이고, 세 번째가 내가 지금 타고 있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다. 스페인까지 육로로 가는 길을 생각해야 했는데, 단순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였다. 전부터 타보고 싶었던 열차이기도 했고,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잇는 유일하고도, 가장 빠른 육로 루트니, 사실상 뺄 수 없는 과정이긴 하다. 그렇게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나의 '여행 속 여행 버킷리스트'가 된 것이다. 물론 여행을 계속하며 다양한 경험들을 했고, 재밌는 순간들도 생각보다 많이 만나는 바람에, 막상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탈 날이 다가오니 예전만큼의 설렘은 없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블라디보스톡 역


    열차는 19시 10분 열차다. 숙소와 블라디보스톡 역이 멀지 않아, 체크아웃을 하고도 시간이 꽤 남았다. 숙소 사장님께 양해를 구해, 체크아웃 이후에도 숙소 휴게실에서 머물 수 있었다. 열차를 타는 동안 심심할 것을 대비해 아이패드에 영화도 잔뜩 넣어두고, 생각도 정리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휴게실에 머물렀다. 이상하게 밥때가 되어도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설레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날씨가 추워서 그랬을까? 열차를 타면 밥을 제대로 먹지도 못할 텐데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고, 열차를 타기 두 시간 전 즈음에서야 겨우겨우 햄버거 하나를 사 먹고 짐을 챙겨 역으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톡 역은 생각보다 작았다. 이곳이 과연 그 유명한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종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았다. 우리나라의 서울역이 더 큰 듯하다. 되려 서울역엔 9000km를 달릴 수 있는 열차가 없는데도 말이다. 아, 만약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이름이 유라시아 횡단 열차로 바뀌고, 서울역이 그 열차의 종점이 된다면 그땐 규모가 딱 어울리겠다. (언젠간 유라시아 횡단 열차가 열리는 때가 오겠지?) 아무튼 블라디보스톡 역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인터넷으로 발급받은 티켓을 실물 티켓으로 교환하고, 역 앞에 있는 마트에서 장을 볼 요량이었다.

    사실 열차를 타는 일이 조금 겁났다. 내 여행은 인터넷에 의존하지 않고 내 맘대로 만들어 가며 부딪혀야지 하며 그렇게나 다짐했는데,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니,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대한 정보를 열심히 찾아봤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열차를 타기 전에 준비물을 꽤 많이 챙기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나도 괜히 준비물을 좀 챙겨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마트에서 컵라면 두 개와 물, 오래 먹을 수 있는 빵과 딸기잼을 산 게 고작이지만, 이게 나름대로 든든했다. 열차가 아무리 최악이어도, 일주일은 버틸 수 있겠지.




    나는 7호차 43번 좌석이다. 복도 쪽 1층 자리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머무는 동안은 보이지 않았던 많은 한국인들도 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내가 타고 있는 7호차에도 내 뒤쪽으로 한국분 아주머니 한분, 그리고 앞 쪽의 4인석 자리에 1,2층을 나누어 탄 한국인 모녀가 있었다. 열차를 탈 때 보니 더 많은 한국인이 있었는데, 아마 다른 차에도 꽤 많은 한국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말을 붙여 볼까 고민하다가, 문득 내일도 모레도 기회가 있겠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기차 안에서라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도 괜찮다는 게 재밌다. 이 열차에 탑승한 모두가 똑같이 모스크바에 가는 건 아니겠지만, 긴 시간 한 공간에서 함께 한다는 게 참 재밌다.


의자 밑에 짐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긴 시간을 타고 가야 한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금세 지루해졌다. 벌써 할 일이 다 떨어진 거다. 핸드폰은 터지질 않고, 그렇다고 뭘 먹으며 시간을 보내자니 배가 고프지도 않다. 그저 멀뚱멀뚱 다른 사람들은 뭘 하나 구경하고, 창밖을 바라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이렇게 6박 7일을 가야 하다니, 생각보다 심심하겠다.

    인터넷에 횡단 열차에 관한 정보를 검색했을 때 사실 나처럼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한 번에 쭉 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중간에 내려서 바이칼 호수나, 러시아의 다른 지역들도 구경하며, 다시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까지 가는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가진 게 시간뿐이라(심지어 러시아 무비자 기간도 60일로 꽤 길다.) 다른 곳들도 보면 좋겠다만, 처음부터 나의 목표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타보는 것이기에, 내가 만든 이 룰을 지켜야 한다. 9박 10일의 시간을 온전히 버텨보고 싶은 가보다. 이상한 마음이지만 도대체 나는 왜 스스로를 자꾸 괴롭히려고 하는 걸까? 아무튼 그 불편함을 이겨내고 성장하고 싶었던 셈 쳐야지.

    심심하긴 하다만, 그래도 난 흥미로운 시간 속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조금 걱정도 든다. 이 시간이 반복되어 지겨워지면 어떡하지? 이렇게나 좋은 변화점,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음에도 지겨워하며, 또 새로운 변화를 욕심내면 어떡하지?

    기차를 타기 전 한국에 있는 친구와 대화를 하는데, 그 친구가 문득 어차피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 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많이 버리고 오라고 얘기했다. 그래 나도 많이 버리고 싶다. 특히나 이 욕심을 많이 버리고 싶다. 결국 내가 고통스러운 건 욕심을 내기 때문일 텐데, 이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싶다. 버리면 고통도 덜하고, 이 순간을 온전히 더 즐길 수 있을 텐데, 내가 흥미로운 시간 속에 있다는 걸 잊지 않을 텐데.


기차의 내부 모습


    지난번에도 잠시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동’ 자체가 주는 깨달음이 있다고 믿는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온갖 부끄러운 표현들을 빌려 표현하면 '전진', '출발', ' 탈피와 새로운 시작' 이런 단어들을 쓸 수 있겠지만, 이와는 다르게 확실히 내게는 '이동'이 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단순히 똑같이 멍 때리는 시간이어도, 이동수단 안에서의 멍 때리는 시간은 괜히 더 깊게 느껴진다. 그리고 오늘은 더 특별한 이동수단에 몸을 실었고, 그 시간이 괜스레 더 깊다. 더 깊게 나를 돌아보는 거다.

    바라건대 (아, 이 또한 욕심인가), 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또 한 번의 나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게 아니더라도, 블라디보스톡에서 열차를 탈 때의 한성호 보다는 조금 더 욕심을 버린, 조금 더 여유를 가진, 덜 병신스러운 모습으로 모스크바에 내리는 한성호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뱀이 허물을 벗듯 탈피 과정을 거쳐 좀 더 깔끔한 한성호가 되기를.

긴 시간 나와 함께 할 친구


    창밖으로는 어둠이 짙게 깔렸다. 어둠을 뚫고 보이는 달만이 선명하다. 달의 위치가 도통 변하질 않는다. 정말 내가 긴 노선을 탑승하긴 했나 보다. 심지어 방향도 잘 바꾸지 않는, 그저 동에서 서로 열심히 달리는 아주 긴 노선을 탔나 보다. 짧은 노선이었으면 방향을 이리 틀고 저리 트느라 바빴을 텐데, 몸이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열차가 달리는 소리만 열심이다. 이것마저 들리지 않는다면 멈춰 서있다고 착각할 법도 하다.


    아 근데 진짜 좋다 뭔가. 뭐라 설명할 순 없는데, 그저 창밖을 바라보고 있어도 참 좋긴 좋다. 이제 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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