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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Jun 30. 2021

시베리아횡단 열차_이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의 둘째 날 밤의 기록

    그러고 보니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이동 수단을 타고 있다. 예전에 유럽 여행을 갈 때 탔던 비행기가 13시간, 지난번 치앙마이-방콕 기차가 13시간, 그리고 얼마 전 난닝에서 상하이로 대륙을 가로질러 갈 때엔 26시간이 걸렸는데, 지금은 벌써 약 30시간째를 향해서 가고 있다. 기차가 달리는 와중에 시차가 생기는 걸 감안하더라도 29시간이다. 최고 기록. 앞으로 이 열차를 다시 타지 않는 한 이 기록이 깨질 일은 없겠다.


    사실 일기를 쓰는 게 민망할 정도로 하루 동안 그렇게 특별한 일은 없었다. 굳이 특별한 일이 있다면, 처음으로 기차에서 잠깐 내렸다는 사실 정도다. 부끄럽지만 흡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기차 내에선 당연히 흡연을 할 수 없으니 열차가 정차했을 때 잠깐 내려 흡연을 해야 했는데, 사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조금 겁이 났다. 혹 나도 모르게 열차가 나를 버리고 떠나버리면 어떡하나 걱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열차에 조금 익숙해지니 동이 틀 무렵 사람들이 분주히 겉옷을 챙겨서 밖으로 나갈 때, '저들과 같이 들어오면 되겠지' 하며 잠깐 다녀왔다.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흡연을 하지 않은 것도 최고 기록 아닐까?


동틀녘 즈음의 풍경 / 창밖으로 보이는 (대부분의 똑같은) 풍경


    내가 타고 있는 곳은 3등석인데, 3등석은 전부 2층 침대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 나는 조금 편해 보이는 복도 쪽 1층 자리를 선택했다. 매번 2층에 번거롭게 올라갈 필요도 없고, 2층에 있는 사람과 함께 쓸 테이블을 내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으니까, 아침저녁으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선택은 반만 적중했다. 2층에 번거롭게 올라갈 필요가 없는 건 아주 맘에 들긴 하지만 눈치면에 있어선 실패했다. 2층에 누워있는 사람이 혹여나 일찍 내려올까 봐 더 누워 있고 싶음에도, 일찍 일어나 테이블을 만들어두게 되고, 2층 사람이 언제 올라가나 눈치를 보며 한참을 기다렸다가 테이블을 접어 침대로 만들어야 했다. 차라리 이럴 거면 복도 쪽 자리 말고 테이블이 이미 세팅되어 있는 반대편 자리로 할 걸 그랬다. 4인이 한 그룹이 되어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보다, 1대 1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서 복도 쪽을 선택한 건데.

    사실 2층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해결될 일이긴 하다. 이제 자리를 폈으니 내려오시라고, 그리고 이제는 눕고 싶으니까 올라가시라고 말하면 되는 건데, 나의 파트너는 러시아 아줌마였다. 그것도 말수가 굉장히 없으신 러시아 아줌마. 아직까지 그녀와 대화를 나눠 보지 않았다. 물론 내가 먼저 말을 붙일 수도 있었겠지만, 영어도 통하지 않을게 뻔한데 굳이 번역기까지 돌려가며 대화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 번 말을 터두면 사이가 편해지고, 불편함이 해소될 것이란 걸 알지만, 굳이 어렵게 누군가와의 관계를 새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요새 들어 부쩍 새로운 관계가 어렵고 귀찮다. 예전 라오스에 있을 땐 일부러 사람들 많은 데로 가서 말도 붙이고 했었는데, 그 모습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다양한 모습의 나를 만나는 중인가 보다.


컵과 뜨거운 물은 무료다

    밥은 잘 챙겨 먹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배고픔을 억지로 참는 수준까진 아니고, 움직임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이다. 어제 사둔 빵과 잼으로 오늘 아침 겸 점심을 해결했고, 저녁엔 길게 정차하는 역에 내려 희한한 빵을 사 왔다. 간단한 식사지만 이 정도로 충분했다. 아직도 빵과 쨈이 한참이 남아있고, 앞자리 모녀 분들이 주신 컵밥과 미역국, 또 도시락 컵라면도 있다. 이걸로 기차에서 내릴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만 같다. 혹 모자라더라도, 하루에 한 번씩 길게 정차하는 시간에 먹을 걸 사 오면 식사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횡단 열차를 타는 값으로 큰돈을 소비하긴 했지만, 하루 평균 숙박비와 교통비, 식비를 다 따져보면 예상보다 지출이 적어 다행이다. 그나저나 나는 남은 돈으로 얼마나 더 버티며 여행을 이어 갈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나는 왜 언제부턴가 버틴다는 생각으로 여행을 하고 있지?

    왜 즐기지 못하고 즐기지 아니하고 있을까?


Obluchye 역 / 잠깐 정차하는 역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는 사람들

오늘의 노을


    한 자세로 앉아 책을 읽다가 스트레칭도 할 겸 잠깐 쉬려는데, 창밖에 노을이 한창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노을이 유독 황홀했다. 정말 멋진 노을이라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시간은 분명 사색의 시간인데, 마땅히 깊이 생각할 만한 고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뭔가 답답한 마음이 들기에, 노을을 핑계 삼아 글을 써볼까 싶었지만, 마땅히 글 쓸 거리도 없었다. 뭔가 생각할만한 거리가, 그리고 깊이 있는 고민이 있는 것만 같은데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그저 나의 깊은 곳 어딘가에서 답답함의 원흉이 되고 있는 어떠한 고민이 잠깐 얼굴만을 내비친 것만 같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나 여기 있긴 있어~ 까먹지 마^^’ 하며 놀리는 것 같은 기분. 묘하다.


    굳이 그 고민을 꺼내어 봐야 하나, 굳이 생각의 실마리를 끝까지 붙잡고 늘어져 해결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저민다. 그 고민이 나의 일상을 크게 침범하지 않는다면, 그냥 이렇게 한편에 묻고 살아가도 괜찮은 거 아닐까? 가슴에 묻는다는 게 혹 이런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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