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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Jun 25. 2021

In&Output_Vladivostok, Russia

블라디보스톡에서의시간

  지난날 소통의 필요성을 느끼고, 일부러 블라디보스톡에선 한인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혹 한국인 여행객을 만나 재미난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머무는 내내 손님이 나 밖에 없었다. 비싸더라도 일부러 이곳으로 온 건데, 숙소를 옮길까도 생각했지만 이왕 벌어진 일, 편하게 쉬자는 마음으로 1인 투숙객이 되었다. 아마도 신께서 자꾸만 나를 혼자로 만들어서 뭔가를 생각하고 얻어내라고 계획하신 일인가 본데, 그 계획을 따라 드려야지.


  러시아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크게 체감되는 불편한 점이 하나 있다. 러시아엔 추운 날이 많아서 그런가 건물의 외벽이 꽤 두껍다. 그래서 그런지 식당들이 전부 베일에 감춰진 느낌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가게들이 유리를 많이 쓰질 않고, 유리가 있다고 해도 크기가 작아서, 뭘 파는 가게인지 도통 알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안쪽에서 뭘 파는지 알 수가 없으니 이것 참, 들어가기 난감하다. 돈을 아끼려면 메뉴를 먼저 알고, 대충의 가격을 파악해야 하는데, 괜히 잘 못 들어가서 비싼 음식을 시켜 먹을까 봐 늘 노심초사다.



블라디보스톡 혁명광장

  블라디보스톡은 넓지 않았다. 도착한 첫날 짐을 풀자마자 길을 나섰는데, 혁명광장부터 독수리 전망대까지 시내의 관광지들은 전부 구경할 수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날짜가 좀 남아 있어서 비교적 오래 머물러야 했는데, 하루 만에 볼거리가 끝나버리니 덕분에 숙소에 머무는 시간이 참 많았다. 이를 벗어나 보고자, 하루는 저녁 늦게 영화라도 한편 보려고 혁명광장 근처의 극장엘 가보기도 했는데, 러시아 극장에 상영되는 영화들은 전부 러시아어 더빙이라고 한다. 에라이.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자, 숙소에서 맥주라도 한 잔 할 생각에 마트에 들렀는데, 이번엔 술 판매 시간이 지났다고 술을 팔지 않는다. 나원참. 아무리 나를 혼자 두려고 하는 신의 계획이라지만, 이건 너무 한 거 아니냐고.


독수리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 / 이곳에서면 금각교가 한눈에 보인다

  다행히 하루는 관광다운 관광을 했다. 바로 근교에 있는 루스키섬에 다녀온 것이다. 생각해보면 북경에서 자금성에 다녀온 이후로 관광이란 걸 한 적이 없었다. 연길에서는 춥다는 핑계로 주야장천 숙소에 있기 바빴고, 우수리스크엔 관광할만한 게 없었다. 마침 관광에 목말라 있었는데, 마침 숙소의 사장님이 블라디보스톡에 왔으면 루스키섬은 무조건 다녀와야 한다며 나를 유혹했다. 사실 며칠에 걸친 긴 유혹이었다. 투어의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결국엔 800 루블까지 깎아주시니 안 가볼 수가 없다.

  이 거대한 땅을 가진 러시아에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없을 리 만무하지만, 루스키섬은 ‘오! 러시아에 이런 곳도 있어?’ 싶을 만큼 멋진 자연경관을 자랑했다. 영하의 날씨 속에 트레킹을 해야 했지만, 해안절벽을 따라 걷는 일이 재밌었다.


루스키섬의 풍경

  갑자기 분위기를 깨인 이야기일 수 있겠으나, 나는 이런 장관 속에 있으면 희한하게 담배 생각이 난다. 이렇게 담배가 생각나게 된 건, 예전에 친구와 함께 제주도에 놀러 갔을 때의 일 때문이다. 여행 이틀 차였나, 새벽 무렵에 일찍 잠에서 깼던 적이 있다. 머물던 도미토리에서 나와 여명이 깃든 파도가 치는 바닷가를 바라보며 습관처럼 담배를 하나 폈는데, 그 담배가 그렇게나 좋아서 기억에 남는다. 담배가 맛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젠 그 당시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다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담배는 내게 물리적인 나쁜 영향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무언가를 줬다. 기나긴 고민을 끝내고, 새로운 변화를 맞이 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이다.

  그때 이후로 멋진 자연경관을 보면 늘 담배 생각이 난다. 아마 그때처럼 기나긴 고민의 결말, 생각의 변화를 또 느끼고 싶은가 보다. 다행히도 오늘 루스키섬에서 그때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바위의 생김새도, 물의 빛깔도 제주도와 비슷해서일까 그때와 비슷했다. 담배 한 까치로 극단적인 변화를 맞이한 건 아니지만 이전까지의 한성호를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게 되었다고 표현해야 할까? 아무튼, 갑자기 허세 가득히 담배를 찬양했는데 그만큼 루스키섬이 맘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루스키섬의 해안절벽

    사장님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루스키섬으로, 그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마치 가이드처럼 러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문득 그 모습에서 가이드로서 일하던 내가 겹쳐 보였다.


‘내가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내가 저렇게 재미없는 농담을 했었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내겐 휴식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만일 잠깐 쉴 수 있었다면 그렇게나 갑작스럽게 그만두지 않았을 텐데. 쉬면서 다른 사람의 가이드를 들었더라면 오늘처럼 내가 겹쳐 보이면서 좀 더 힘이 났었을 것 같다. 특히나 그들을 통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구나.’ 하며 나를 다독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때의 난 참 많이 약했고, 예민했나 보다. 지금 와 생각하면 별거 아닌데, 뭐가 그렇게나 싫었는지.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마약등대


    가끔 나를 게임 캐릭터로 비유하거나, 기계로 생각해며 내 상황을 살피곤 한다. 글쎄, 내가 만일 인풋을 받아 아웃풋을 만들어내는 어떤 비디오 플레이어 같은 기계라면, 나는 지금 여행이라는 큰 ‘인풋’, 비디오를 돌리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인풋을 나름대로 처리해서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로 ‘아웃풋’을 뽑아내는데, 이는 사실 나를 위한 아웃풋이다. 글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만한 글인지는 모르겠다만, 무엇보다 첫 번째로 중요한 건 나를 위한 글이다. 미래의 나를 위해 기록해두는 거다. 나를 더 성숙시키기 위한 아웃풋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행히도 블라디보스톡에서 괜찮은 인풋을 얻었다. 사실 이제 연말이라 그런가 기분이 꽤 싱숭생숭했다. 날도 춥고 길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도 울리고,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기 일보직전이었는데, 새로운 인풋 덕분에 잘 참아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아마 당분간 나의 인풋들은 넷플릭스로부터 시작될 것 같다는 점인데, 곧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기 때문이다. 기차 안에서 혹 심심할까 봐 아이패드에 영화를 잔뜩 저장해둔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영화도 좋은 인풋이겠다만, 곧이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도 부디 신선한 인풋들로 가득 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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