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Output_Vladivostok, Russia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시간

by 한성호

지난날 소통의 필요성을 느끼고, 일부러 블라디보스톡에선 한인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혹 한국인 여행객을 만나 재미난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머무는 내내 손님이 나 밖에 없었다. 비싸더라도 일부러 이곳으로 온 건데, 숙소를 옮길까도 생각했지만 이왕 벌어진 일, 편하게 쉬자는 마음으로 1인 투숙객이 되었다. 아마도 신께서 자꾸만 나를 혼자로 만들어서 뭔가를 생각하고 얻어내라고 계획하신 일인가 본데, 그 계획을 따라 드려야지.


러시아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크게 체감되는 불편한 점이 하나 있다. 러시아엔 추운 날이 많아서 그런가 건물의 외벽이 꽤 두껍다. 그래서 그런지 식당들이 전부 베일에 감춰진 느낌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가게들이 유리를 많이 쓰질 않고, 유리가 있다고 해도 크기가 작아서, 뭘 파는 가게인지 도통 알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안쪽에서 뭘 파는지 알 수가 없으니 이것 참, 들어가기 난감하다. 돈을 아끼려면 메뉴를 먼저 알고, 대충의 가격을 파악해야 하는데, 괜히 잘 못 들어가서 비싼 음식을 시켜 먹을까 봐 늘 노심초사다.



IMG_4879.jpg 블라디보스톡 혁명광장

블라디보스톡은 넓지 않았다. 도착한 첫날 짐을 풀자마자 길을 나섰는데, 혁명광장부터 독수리 전망대까지 시내의 관광지들은 전부 구경할 수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날짜가 좀 남아 있어서 비교적 오래 머물러야 했는데, 하루 만에 볼거리가 끝나버리니 덕분에 숙소에 머무는 시간이 참 많았다. 이를 벗어나 보고자, 하루는 저녁 늦게 영화라도 한편 보려고 혁명광장 근처의 극장엘 가보기도 했는데, 러시아 극장에 상영되는 영화들은 전부 러시아어 더빙이라고 한다. 에라이.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자, 숙소에서 맥주라도 한 잔 할 생각에 마트에 들렀는데, 이번엔 술 판매 시간이 지났다고 술을 팔지 않는다. 나원참. 아무리 나를 혼자 두려고 하는 신의 계획이라지만, 이건 너무 한 거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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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 / 이곳에서면 금각교가 한눈에 보인다

다행히 하루는 관광다운 관광을 했다. 바로 근교에 있는 루스키섬에 다녀온 것이다. 생각해보면 북경에서 자금성에 다녀온 이후로 관광이란 걸 한 적이 없었다. 연길에서는 춥다는 핑계로 주야장천 숙소에 있기 바빴고, 우수리스크엔 관광할만한 게 없었다. 마침 관광에 목말라 있었는데, 마침 숙소의 사장님이 블라디보스톡에 왔으면 루스키섬은 무조건 다녀와야 한다며 나를 유혹했다. 사실 며칠에 걸친 긴 유혹이었다. 투어의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결국엔 800 루블까지 깎아주시니 안 가볼 수가 없다.

이 거대한 땅을 가진 러시아에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없을 리 만무하지만, 루스키섬은 ‘오! 러시아에 이런 곳도 있어?’ 싶을 만큼 멋진 자연경관을 자랑했다. 영하의 날씨 속에 트레킹을 해야 했지만, 해안절벽을 따라 걷는 일이 재밌었다.


IMG_4930.jpg 루스키섬의 풍경

갑자기 분위기를 깨인 이야기일 수 있겠으나, 나는 이런 장관 속에 있으면 희한하게 담배 생각이 난다. 이렇게 담배가 생각나게 된 건, 예전에 친구와 함께 제주도에 놀러 갔을 때의 일 때문이다. 여행 이틀 차였나, 새벽 무렵에 일찍 잠에서 깼던 적이 있다. 머물던 도미토리에서 나와 여명이 깃든 파도가 치는 바닷가를 바라보며 습관처럼 담배를 하나 폈는데, 그 담배가 그렇게나 좋아서 기억에 남는다. 담배가 맛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젠 그 당시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다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담배는 내게 물리적인 나쁜 영향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무언가를 줬다. 기나긴 고민을 끝내고, 새로운 변화를 맞이 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이다.

그때 이후로 멋진 자연경관을 보면 늘 담배 생각이 난다. 아마 그때처럼 기나긴 고민의 결말, 생각의 변화를 또 느끼고 싶은가 보다. 다행히도 오늘 루스키섬에서 그때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바위의 생김새도, 물의 빛깔도 제주도와 비슷해서일까 그때와 비슷했다. 담배 한 까치로 극단적인 변화를 맞이한 건 아니지만 이전까지의 한성호를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게 되었다고 표현해야 할까? 아무튼, 갑자기 허세 가득히 담배를 찬양했는데 그만큼 루스키섬이 맘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IMG_4939.jpg 루스키섬의 해안절벽

사장님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루스키섬으로, 그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마치 가이드처럼 러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문득 그 모습에서 가이드로서 일하던 내가 겹쳐 보였다.


‘내가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내가 저렇게 재미없는 농담을 했었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내겐 휴식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만일 잠깐 쉴 수 있었다면 그렇게나 갑작스럽게 그만두지 않았을 텐데. 쉬면서 다른 사람의 가이드를 들었더라면 오늘처럼 내가 겹쳐 보이면서 좀 더 힘이 났었을 것 같다. 특히나 그들을 통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구나.’ 하며 나를 다독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때의 난 참 많이 약했고, 예민했나 보다. 지금 와 생각하면 별거 아닌데, 뭐가 그렇게나 싫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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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마약등대


가끔 나를 게임 캐릭터로 비유하거나, 기계로 생각해며 내 상황을 살피곤 한다. 글쎄, 내가 만일 인풋을 받아 아웃풋을 만들어내는 어떤 비디오 플레이어 같은 기계라면, 나는 지금 여행이라는 큰 ‘인풋’, 비디오를 돌리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인풋을 나름대로 처리해서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로 ‘아웃풋’을 뽑아내는데, 이는 사실 나를 위한 아웃풋이다. 글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만한 글인지는 모르겠다만, 무엇보다 첫 번째로 중요한 건 나를 위한 글이다. 미래의 나를 위해 기록해두는 거다. 나를 더 성숙시키기 위한 아웃풋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행히도 블라디보스톡에서 괜찮은 인풋을 얻었다. 사실 이제 연말이라 그런가 기분이 꽤 싱숭생숭했다. 날도 춥고 길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도 울리고,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기 일보직전이었는데, 새로운 인풋 덕분에 잘 참아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아마 당분간 나의 인풋들은 넷플릭스로부터 시작될 것 같다는 점인데, 곧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기 때문이다. 기차 안에서 혹 심심할까 봐 아이패드에 영화를 잔뜩 저장해둔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영화도 좋은 인풋이겠다만, 곧이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도 부디 신선한 인풋들로 가득 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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