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성호 Jun 24. 2021

멀고도 가까운_Ussuriysk, Russia

우수리스크에서의 날

    우수리스크는 나의 러시아 여행의 첫 도시가 되었다.


    마침 우수리스크라고 쓰다 보니, 예전 이곳의 마을 이름이 '우수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물론 찾아보니 전혀 연관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만큼 우리나라와 연결점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지난 연길에는 조선족이 많았고, 이곳에는 고려족(고려인)이 많다. 북한 때문에 가로막혀 느낄 수 없었던 , 타국가의 같은 민족들을 보게 되니 느낌이 이상하다. 우리나라는 어찌 보면 섬나라에 가까워, 다른 말을 쓰는 같은 민족을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렇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우리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은 우리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은 우리와 똑같이 생긴 채 유창한 러시아어를 구사한다. 아니 러시아어가 모국어이다. 우리말은 하나도 모른다. 이런 그들이 모습이 굉장히 낯설다.

우수리스크의 풍경들 날이 추워서 그랬는지 굉장히 삭막한 모습이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에 잠시 들르는 작은 마을 정도로 생각했기에, 우수리스크에선 한 일이 많지 않다. 지금에서야 여행기를 정리하며 우수리스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는데, 여행을 하던 당시에 알고 있던 사실보다, 우수리스크는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정착했던 곳이 우수리스크이고, 심지어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서쪽에 흩어져있던 고려인들이 재정착을 위해 '우정마을'이라는 마을을 재건하여 고려인 터전의 중심지가 된 곳이라고 한다. 그에 걸맞게 고려인 문화센터도 건립돼 있다고 하는데, 이곳의 한식을 한 끼 먹었어야 했는데, 문득 아쉬움이 남는다.

    그 당시의 난 단순히 나는 고려인이 많은 곳,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생가가 있는 곳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예전엔 쌍성자라고 불리며 독립운동 사료에 이따금 등장할 만큼 독립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곳이었나 보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생가뿐만 아니라 이상설의 유허비라던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옮겨온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 등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관련한 유적이 많은 곳이다. 변명을 하자면 이상설 유허비는 너무 멀리 있었기에, 나는 고작해야 최재형 선생님의 생가 정도를 가보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일찍이 알았다면 차편을 찾아 이상설의 유허비에도 가보고, 고려인 문화센터에 들러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도 보고 싶다. 최재형 생가를 둘러보며 이렇게 추운 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생하신 그분들을 생각하며 가슴 시려했는데(실제로 날씨가 너무 시리기도 했고) 놓친 부분이 꽤 많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님의 고택


    숙소에선 키르기스탄에서 온 다미에르를 만났다. 나는 역시나 저렴한 숙소를 찾다 보니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머무는 호스텔로 오게 되었는데, 사실 나는 이게 겁났다. 편견이겠지만 괜스레 외국인 노동자라 하면, 심지어 타국에서 만나는 외국인 노동자라 하면 거친 성향의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랬다. 내 방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전부 우락부락한 형님들이었다. 말 한마디 잘 못 걸었다가는 내 코를 밀가루 반죽처럼 부숴 놓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런 무서움을 다미에르가 해소시켜준 것이다. 그는 여행을 하고 있는 나를 신기해했고, 먼저 말을 걸어오며 방의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해줬다. 덕분에 그들과 함께 맥주를 나눠마시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재미난 이야기를 하자면 역시나 그들은 상남자였다. 맥주를 마시며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이제 우리는 친구가 되었으니 나를 지키기 위해 사람도 죽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던 그들이 문득 고맙다. 숙소로 돌아가는 일이 꽤 든든해진 기분이다.

처음엔 눕기조차 무서웠지만, 이제는 포근해진 나의 숙소

    우수리스크에선 버스에서 만나 내게 빵을 나눠주는 호의를 베풀었던 그 분과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셨는데, 덕분에 우수리스크의 제대로 된 식당에서 멋진 한 끼를 함께 나눴다. 감사의 표시로 내가 계산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했는데, 나중에 갚으라며 나를 말리시던 모습이 아직까지 감사하다. 처음엔 너무나도 친절하신 분이라 오히려 그를 대하기 어려웠다. 마치 선생님 같았다고 해야 하나, 딱딱한 느낌을 굉장히 많이 받았는데, 오늘의 저녁식사 자리를 시작으로 형님 아우로 지내기로 했다.(실제로 현재까지 형님 아우 하며 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 형님도 똑같은 대한민국 남자더라. 식사 자리에 함께 나온 중국인 아내분의 말에 끔뻑 죽는 걸 보며 괜스레 동질감이 느껴지고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다.


형님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외롭게 지내려 애썼는데, 나도 인간인지라 소통이 많이 필요한가 보다. 다미에르와의 대화도 같은 이유로 굉장히 즐거웠고, 형님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함께 나누는 대화도 즐거웠다. 소통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걸 먼 타국에서,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중국 탈출_Ussuriysk, Russia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