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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Jul 02. 2021

시베리아횡단 열차_나흘

세계여행 200일 차, 밤의 기록

    브런치에 내가 며칠간 여행을 했는지 표시하지 않았지만, 벌써 여행을 시작한 지 200일이 되었다.


와 성호야 벌써 200일이야. 200일 된 거 축하한다.
큰 탈 없이 잘하고 있구나 대단해.
그리고 대견해.
요새 슬럼프라지?
하지만 슬럼프는 여행을 하지 않았어도 분명 겪을 일이었을 거야.
그런데, 지금의 슬럼프는 여행 속 슬럼프니까, 나름 큰 의미이지 않겠니?
그래,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만은 말자.


    처음 시작할 땐 내가 이만큼까지 할 수 있을지 몰랐다. 가이드로 일하며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데에 익숙했던 탓일까, 늘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 가야 하는 이 여행은 날이 갈수록 어렵지 않았다. 하다 보니 점점 자신감이 붙고, 더 갈 수 있을 것 같고,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더 가고, 더 하고 있다. 분명 7, 8개월 전의 계획은 겨울이 되기 전에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었는데, '연말에 가자', '해를 넘기고 가자.' 하며 점점 늘어나 '1년을 채우고 가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 1년이면 충분하겠다. 하지만 이러다가 더 늘어나는 거 아닌가 하는 기우도 든다. 이젠 나도 나를 잘 모르겠으니까.


옆자리의 이름 모를 친구가, 차창 넘어 보이는 설경


    나는 어쩌다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중간중간 계속해서 내게 되묻는 질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돈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자유가 생겼기 때문에', 그리고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일이기 때문에' 같이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답은 뭘까를 고민한다. 도대체 나는 왜 여행을 시작했는가?


    나는 더 단단한 나를 만들고 싶었다.


    예전에 한창 연기를 공부하던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는 사실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언젠가는 힘들어서 그만두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연기를 그만두고 싶지 않음에도, '(연기를 너무 못하니까) 빨리 다른 걸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던 같은 기수의 형에게 물었다.


    '형 연기를 그만둬야 할 것 같은 상황이 생기면 어떡할까?'


    그 당시의 그 형은 (그리고 지금도) 죽을 때까지 연기를 그만둘 것 같지 않았다. 그런 그는 내게 그만둘 수 없는 이유를 만들으라 했다. '내가 이거 때문에라도 그만둘 수 없지'라고 말할 수 있는, 쪼개고 쪼개도 쪼개어지지 않는 이유를 만들라고 했다. 그 형의 쪼개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만의 소중한 프라이버시니까 이곳에서 이야기할 수 없지만, 간단한 이유임에도 그것 때문에 연기를 그만둘 수 없겠구나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에게 단단했기에, 다른 건 다 양보하더라도 그는 '연기를 한다.'는 행위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내게도 그런 이유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떠냐고 말했다.


이 열차는 바이칼 호수를 지난다


    그 말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현재의 나는 '나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 이 여행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로 고른 것은 '단단한 나'이다. 내 존재 자체가 단단해져서 쪼개고 쪼개도 쪼개어지지 않는 이유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단단한 한성호를 만들기 위해 단련이 필요하고, 그 단련으로 이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이 여행은 단련이다. 도전이다. 여행을 통해 많은 걸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감성을 충전하고, 심미안을 키우고 뭐든 다 좋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도전임을, 단단한 나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다.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앞으로 내게 어떠한 큰 시련이 닥쳐와도, 나는 내 속에 '단단한 나'가 있기 때문에 나를 포기할 수 없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200일 전의 나보다, 얼마나 단단해졌을까? 글쎄, 이 질문은 아마도 여행이 다 끝나고 나서야 답을 내릴 수 있겠다. 아니 어쩌면 평생 동안 내가 단단해졌다는 걸 체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과정은 분명 존재했음을 잊지 말자. 여행을 통해 단단해지는 과정을 거쳤다는 건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니까. 이 과정을 믿고, 보다 단단해졌다는 걸 믿고,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내가 되었으면 한다.




얼어붙은 창문 넘어 보이는 바이칼


    하루 종일 열차 안에 있으면 심심한 시간들이 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다. 심심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은 금세 창 밖의 풍경으로 지워진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설원, 눈 덮인 숲의 풍경이 전부이긴 하지만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 즐겁다. (멍한 시간이 많다 보니, 괜히 이상한 생각들도 많이 들어 이런 똥 같은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사실 오늘의 풍경은 설원, 설산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은 열차가 바이칼 호수를 지났기 때문이다. 바이칼 호수의 남쪽을 4-5시간 정도 달린 듯하다. 기차 안에 있어서 바이칼호의 규모를 실로 체감할 순 없었지만 항상 설원, 설산만 바라보다 호수 넘어의 수평선을 바라보니 신기하다. 그런데, 이제야 바이칼호를 지난다고? 이 열차 제대로 달리고 있는 건 맞나?


매일 아침마다 보는 선라이즈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밥을 먹다 보면, 책을 읽다 보면, 또 영화를 보다 보면 금세 하루가 지난다. 요 근래 신기한 건, 그렇게나 아침잠이 많은 나인데도, 신기하게 해가 뜰 때 같이 눈이 떠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매일매일의 일출을 보고 있는데, 이게 참 장관이다. 아마 이 열차가 달리는 곳이 내가 살던 곳들보다는 꽤 북쪽이라 해가 낮게 뜨기 때문은 아닐까 (너무 이과적 발상이었나). 창밖에 펼쳐진 춥디 추운 설경 뒤로 떠오르는 일출을 따뜻한 열차 안에서 한참을 바라보고는 배시시 잠드는 일이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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