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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Jul 05. 2021

어차피 맘대로 안되는 게인생이지

3개월의 법칙


    사장님은 무슨 생각이셨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바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출근해서 오픈 청소를 하고, 손님 없이 나 홀로 노래를 듣다가, 술을 마셨다. 칵테일을 만들기 귀찮으면 생맥주를, 괜히 칵테일이 당기는 날이면 제일 간단한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며 노래를 듣다가 돌아오는 게 아르바이트의 전부였다. 나는 그날도 지난날들과 똑같은 하루가 흐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오픈하신 건가요?"

    "아 네 들어오세요"


    오픈 청소를 마치자마자 첫 손님이 찾아왔었다. 단골손님이 자주 오는 가게라, 대부분의 손님들은 낯이 익는 편인데, 그녀들은 낯설었다. 어차피 다 빈자리니까 맘에 드시는 자리를 골라 앉으시라고 이야기하고 메뉴판을 내어줬다. 그녀들은 간단한 칵테일을 주문하고는 그녀들끼리의 이야기를 곧장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이어갔다는 표현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바로 본론이었으니까. 아마 어디선가에서 이미 수다를 한참 떨고 왔었나 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칵테일을 만들었다. 그때까진 특별함이라곤 없었다. 단골손님이 아니라 낯선 손님이면 어떠랴, 칵테일 몇 잔 내어주다 보면 또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올 테고, 그럼 난 다른 날들과 똑같이 노래를 듣다가 집에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흘러나오던 노래는 뭐였을까, 굉장히 조용한 노래였던 것 같다. 그 조용한 노래의 틈을 비집고 문득 그녀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제 뭐하지"

    둘 중에 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이 언니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었다.


    단순히 '뭐하고 놀지?'에 대한 질문은 아니어 보였다. 그녀들의 대화는 사뭇 진지했으니까. 그날 그녀들의 모임은 아마도 저 질문을 한 사람의 고민상담을 위해서인가 보다. 그리고 그 질문이, 갑자기 펼쳐진 고민상담소가, 나를 잡아끌었다. 질문을 듣자마자 저 사람도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무얼 할지 몰라 방황하던 때였다. 집에다가 손을 벌릴 순 없으니까, 용돈이라도 벌어보자는 생각으로 바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녀도 똑같이 나와 같은 방황기를 겪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주문하신 데낄라 선라이즈 두 잔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녀들이 주문한 음료를 내어주고, 나는 바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는 매장에 흐르는 음악의 볼륨을 티 나지 않게 천천히 줄였다. 사실 그녀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건, 어떤 사연을 가졌건 내가 알 필요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나는 내 앞에 펼쳐진 고민상담소를 들춰보고 싶었다. 그 고민상담소에서의 내용과, 나의 처지를 비교해가며 내 고민도 해결하고 싶었나 보다. 나는 "이제 뭐하지"라는 질문에 언니라는 사람이 뭐라고 답할지 듣고 싶었다.


    "뭘 고민해, 결국 네 뜻대로 내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어"

    그러면 그렇지 너무나도 흔하디 흔한 조언이었다. 누가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가.

    "OO아 봐라, 내가 인생을 오래 산건 아니지만, 나름 규칙이 있어"

    "무슨 규칙?"

    "나는 내가 1년 뒤에 뭔갈 하겠다고, 뭔가가 되겠다고 1부터 10까지 계획을 세워서 하잖아? 근데, 그건 항상 3개월밖에 안가. 3개월쯤 되면 뭔가 항상 다른 일이 생겨. 그래서 그때 또 그걸 따라서 살다 보면, 또 다른 걸 계획하게 되고, 또 3개월이 흐르고, 뭐 만날 이렇게 반복되더라고"

    처음엔 코웃음이 나왔지만, 이내 웃음은 사그라들었다. 나의 과거를 그녀가 했던 말과 맞춰보며 돌아보니 신기하게 딱 맞아떨어졌다.



    '내가 세운 계획들이 3개월을 넘긴 적이 있던가?'


    아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도, 3개월을 넘긴 적이 없다. 내가 게으르고 실천력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희한하게도 3개월 뒤엔 뭔가 새로운 상황이 생겼다. 그게 긍정적인 상황이건, 부정적인 상황이건 간에 말이다. 전역했을 때도 '이건 10년 계획이다.'라고 말할 만큼 거창한 계획을 세웠으나 3개월이 지나고 보니 계획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다른 걸 하고 있었고, 복학 전에 세 워던 계획들 또한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공연에 갑작스레 투입되어 나를 갈아 넣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가진 의도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면 새로운 상황이 생겨서 또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내가 똑같이 그래 왔다는 사실이 맞아떨어진 게 내겐 꽤 충격이었나 보다. 그날의 기억은 이게 끝이다.


    그리고 충격과 더불어 그녀의 말이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내가 뭘 하든 3개월 뒤에는 늘 새로운 상황이 생긴다는 걸 체감한 이후에 '어차피'라는 말을 습관처럼 쓰게 되었다. '어차피' 새로운 상황이 생길 거라는 걸 받아들이니, 지금 당장 내가 내려야 하는 결정과 선택의 무게가 덜어졌기 때문이다. 선택이 가벼워지니까 쉽게 움직일 수 있었다. 게을렀던 내게, 부지런하지 못했던 내게, 시작할 수 있는 힘과 좀 더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나는 세계여행을 마치고 나면 책을 낼 계획이었다. 그렇게 원고를 만드는 데에 3개월이 소요되었는데, 모든 출판사로부터 거절 메일을 받았다. 우습게도 나는 당연히 내 글을 좋아해 줄 사람이 많을 거라 생각했고, 유명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인생이 내 맘대로 안 된 것이다. 그리고는 그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자 친구와 술을 거하게 마시고는 취한 채로 지원한 회사에 운이 좋게 합격했다.

    3개월 만에, 나는 작가가 아닌 로케이션 매니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3개월 만에 모든 계획이 달라지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그림으로 인생이 흘러가고 있다. 도대체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내가 타고 있는 이 물살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서 어떤 육지에 나를 내려줄까. 아니 육지에 내려주기는 하는 건가.



    ''어차피' 인생은 내 맘대로 안 된다.'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만일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나는 출판사로부터 거절 메일을 받았을 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주저앉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일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며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때에도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고 집에서 유튜브나 쳐 보면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차피 인생이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부정정인 상황에 직면해 주저앉지도, 멍 때리며 인생을 허비하지도 않는다. 나름 생산적인 활동들로 인생을 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생은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꿈꾸고 있는 것들은 그 모습 그대로 온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3개월 뒤면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고, 새롭게 방향을 틀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1년 뒤에 뭔갈 하겠다고, 뭔가가 되겠다고 1부터 10까지 계획을 세워서 하잖아? 근데, 그건 항상 3개월밖에 안가. 3개월쯤 되면 뭔가 항상 다른 일이 생겨"


    내가 인생을 너무 만만히 보고, 쉽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 이후에도 여전히 나는 3개월마다 새로운 상황을 만나고 있다. 내가 뭘 하든 3개월 뒤에는 늘 크고 작은 새로운 상황이 생겼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뭔가를 해야' 새로운 상황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주저앉아있는 이들에게, 시작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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