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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Jun 25. 2021

진짜 일말의 설렘이라곤 없어

엄마 나 오늘 머리가 아파서 수영장에 못 갈 거 같아

    처음으로 무언갈 시작할 땐 늘 두렵다.


    첫 시작이 설렌다는 말은 도대체 누가 만들어낸 걸까?



    첫 출근을 한다. 첫 출근. 나는 로케이션 매니저로 일하게 되었다. 영화나 드라마 광고의 촬영지, 즉 로케이션을 섭외하고 그에 따라오는 제반사항들을 컨트롤하는 것이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일이다. 아쉽게도 아직까진 내가 이 일을 좋아해서 시작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일의 시작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나는 굉장히 두렵다. 이 두려움의 시작은 도대체 어디었을까.


    트라우마라고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시작이 두려웠던 경험이 있다. 이를 되짚어보려면 내가 초등학교 5학년쯤 되었을 무렵, 수영을 배우러 다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나는 아직도 무언갈 시작할 때 이때의 일을 떠올린다.

    희한하게도 내가 다니는 수영장에는 나만큼 수영을 오래 배우는 친구가 없었다. 글쎄, 수영장이 아파트 단지와 멀었던 것도 아니고, 아무리 멀다고 해도 무료 셔틀버스가 다님에도 불구하고 진득하니 수영을 배우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함께 다니는 친구가 없었고, 혹 누군가 같이 다니더라도 그 사람은 금방 그만둬버렸다. 그래서 사실 나는 태권도장에 가는 것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곳엔 친구들이 많았으니까. 이미 오래 다녀서 제 집 드나들듯 다니는 친구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 당시의 태권도는 시작하면 2단까지 따는 게 보통이니까, 누구나 오랫동안 다녀야 했으니까.

    물론 수영도 시작한 김에 접영까지, 그리고 나아가 오리발까지 배우는 사람들이 있기야 하지만 강습이 한 달 단위로 되어있어서 그런가, 대체로 한 달만 다니고 끊는 친구가 많았다. 그래서 난 매월 첫 번째 월요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했다. 친구 말고 오래도록 다니는 사람과 친해지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한 달이 지나면 늘 반도 달라졌다. 수영을 잘하건 못하건 간에, 그 달에 수영을 신청한 인원에 맞춰서 반을 새롭게 편성했으니까. 이게 참 두려웠다. 모르는 사람들과 새롭게 인사하고, 나의 알몸을 공개하고, 물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그 시간이 참 싫었다. 매월 첫날 나는 말 그대로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굴었다.



    나도 잘 안다. 첫날 그 하루만 버티면 그다음부터는 말도 트고, 수영 대결도 하며, 서로의 수영 실력에 지적질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면서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렇다한들 어쩌겠는가 일단 그 첫 단계부터가 지옥인걸. 굳이 그 사람들과 친해질 필요도 없는데, 지옥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늘 피했다. 매월 첫 번째 월요일마다 오늘은 어디가 아프다, 혹은 오늘은 학교 숙제가 너무 많다고 핑계를 대며 수영장에 가기 싫다고 생떼를 부렸다. 갖가지 핑계들을 앞 세워 첫날을 보류했다.

    물론 그런다고 극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금전적으로 따져 봤을 때, 결석을 하면 내 손해다. 아니 우리 부모님의 손해다. 어쨌건 나는 수영장엘 가야 하는 것이다. 첫날은 사라지지 않고 보류가 될 뿐이었다. 첫날을 미루고 한참 늦게 가더라도 첫날은 첫날이다. 고통의 정도가 달라지는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먼저 친해져 있는 사람들 틈에 껴야 하는 것이 더 힘들다. 첫날을 보류하면 할수록 첫날은 더 지옥으로 변해있었다. 결국 나는 이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극복해내지 못하고, 두려움에 굴복했다. 아주 비극적인 결말이다.

    이런 트라우마 덕에 언제고 내게 처음의 순간이 닥치면 그날의 악몽이, 수영장에 가기 전날 밤의 악몽이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이 그렇다.



    내일의 첫 출근이 새벽 05시 30분까지 가야 하기에, 또 바로 현장으로 투입되는 것이기에 두려운 것이 아니다. 되려 이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다. 나는 그저 단순히 첫 시작이라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내일의 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 알몸을 보여줘야 하고, 내 수영실력을 공개해야 하니까.

    내 트라우마는 사실 참 별거 아니다. 그리고 처음이라는 건 누구나 다 겪는 흔하디 흔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시작은 있고, 그 시작은 늘 힘들고 두려울 테다. 누군가는 시작을 설렌다는 말로 표현하던데, 아마 '설레다'라는 단어에 한편으론 두려움을 포함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분명 모두가 두려울 것이다.

    다른 의미로 쓰이는 말이겠지만,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이 반이다' 같은 속담들이 이런 우리의 시작을 응원하는 속담처럼 느껴진다. 그래 이런 속담들이 존재한다는 건, 아마도 우리의 선조들 조차 처음의 두려움을 알고 있었나 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됐는지 잠시 생각해보자. 이 글은 단순히 두렵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어서 쓰는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첫 시작의 두려움에 굴복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사람으로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첫날을 어떻게 극복해 냈는지 노하우를 전해 줄 수 없다. 난 단순히 나의 약점을 먼저 고백함으로써, 근심을 좀 덜고 싶은 심리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냥 죽겠다는 말만 하고 싶은 거다.

    앓는 소리를 하고 있기에, 일말의 긍정적인 이야기 따위를 할 순 없겠다. 하지만 잠시 객관화된 김에 생각해보면 이 것 하나는 분명한듯하다. 수영을 진득하게 배우지 않은 친구들보다, 지금의 나는 수영도 잘하게 되었고, 물도 좋아하게 됐다는 사실. 그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하다.


    죽겠지만, 한 걸음을 내딛어야 천리길이 시작되는 것인가 보다. 도망치고 싶지만, 첫 시작을 돌파해내야 그다음 단계로 가나보다. 참 단순하지만 어쩌면 이게 인생의 순리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나는 이 두려움을 피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내 출근은 정해졌고, 돈은 필요하다. 그러니 두려움은 두려움대로 두고, 눈 딱 감고 가자.


으으으으으으으.


    그래 수영을 잘해서 나쁠 건 하나도 없다. 세상의 모든 경험은 나쁠 게 없다.


으으으으으으으


    진짜 일말의 설렘이라곤 없는데, '설레는 첫 시작' 따위의 말은 누가 생각해 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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