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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Sep 02. 2020

난공불락

난 내가 좋아

    "아 저 새끼는 왜 까도 까도 까는 맛이 안 나냐"

    사태를 심화시킨 것은 나였다.


    글쎄, 몇 번이나 같은 반을 했을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재근이와 나는 늘 같은 학교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우리 동네는 아파트가 참 많았다. 게다가 대부분의 학교들도 아파트와 멀지 않아, 교복의 모양만 달라질 뿐, 등굣길과 하굣길을 함께하는 친구는 늘 같을 수밖에 없었다.

    재근이와 난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사실 같은 반이 된다는 의미가 무색할 만큼 우리는 이미 친했다. 등하교를 늘 같이 했으며, 급식실에 갈 때도, 매점에 갈 때도 늘 함께였다. 그와 내가 학기 초부터 이렇게 격 없이 지내는 모습은 우리를 인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우리는 늘 시끄러웠고, 다른 친구들에게 '나도 저들처럼 친하고 싶다.', '저들의 무리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우리들 무리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촌스럽지만 그 당시의 우리는 스스로를 패밀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재근이 오늘 야자?" 태규가 재근이에게 물었다.

    "아니 오늘 야자 없음"

    "그럼 애들이랑 겜방 고?"

    "오키~"


    '아...... 저 말은 분명 내가 재근이에게 하던 말인데.'

    별 의미 없는 한 문장이었겠지만 태규의 말에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친하던 재근이가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처음부터 친했던 건 재근이와 나, 단 둘 뿐인데, 나보다 그와 더 가까워지는 친구들이 하나 둘 생겨난 것이다. 다른 친구들이 재근이와 가까워질수록 나는 재근이와의 거리감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근이는 그 일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질투가 났다. 그렇게 나는 점점 삐딱선을 탔다. 갈라 진적도 없던, 재근이와의 관계를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그의 제일 친한 친구가 되기를 바랐다. 친구들은 모르는 그의 이야기를 알고 싶었고, 그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었다. 재근이가 힘겹게 본인의 힘든 이야기를 꺼낸다면, 첫 번째로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나이기를 바랐다.

    그날부터 나는 친구들에게 재근이를 깎아내렸다. 다른 친구들로 하여금 그의 세계를 조금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렇게 외부 세력에 의해 그의 세계가 무너진다면, 내가 제일 먼저 달려가 보수공사를 해주리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그의 세계에 내가 들어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씨발 앞으로 나한테 아는 척하면 뒤진다"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재근이를 깎아내린 탓에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차츰 소외되었고, 패밀리의 리더 격이던 재근이의 자리를 꿰찬 태규가 결국 터졌다. 어떤 사건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나는 재근이의 세계에 들어가 그의 세계를 구경하며, 함께 보수공사를 할 생각에 설렜기 때문이다.


    "괜찮아?"

    "뭐가?"

    "태규가 지랄했잖아"

    "아 그냥 나한테 화가 좀 났나 봐."

    "왜 뭐 때문인데"

    "몰라"

    "아무튼, 넌 괜찮아?"

    "응 안 괜찮을게 뭐 있어?"

    계획은 절반만 성공이었다. 나는 재근이의 세계를 기어코 무너뜨렸지만, 그의 세계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 저 새끼는 왜 까도 까도 까는 맛이 안 나냐. 씨발새끼"

    결국 사태를 심화시킨 것은 나였다. 그날 이후 태규는 재근이를 더 짓밟기 시작했고, 재근이의 책상 서랍은 늘 쓰레기로 가득했다. 우리 반의 쓰레기통은 재근이의 책상 서랍이 되었다. 재근이는 소위 말하는 왕따였다. 내가 만든 왕따.


    글쎄, 내가 끝까지 재근이 편이었더라면, 그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알았으려나?  




    "아니"

    "아 그럼 누구누구 있었지?"

    "그니까 너랑 나랑 그리고 태규랑... 아이씨 몇 명 더 있는데......"

    우린 술 한잔 없이 옛날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그땐 미안해"

    "뭐가?"

    "너 왕따 당한 거 내가 그런 거라니까"

    "내가? 왕따를 당했었어? 뭔 개소리야" 재근이가 웃었다.

    재근이는 기억하지 못했다. 정말 감사하게도 재근이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게끔 다시 연락이 닿았고, 나는 몇 번이고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그는 매번 기억하지 못했다. 처음엔 재근이가 일부러 기억을 지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근 몇 년간 재근이와 다시 친하게 지내며 몇 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재근이의 세계는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싶은 생각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제 자신 있게 말한다. 나는 재근이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다. 아니, 있기야 있다. 그러나 그 행위는 재근이의 세계에 닿지 않았다. 재근이의 세계는 난공불락이었고, 우리는 그리고 나는, 그의 세계에 어떠한 상처도 내지 못한 것이다.

    어릴 땐 재근이의 세계가 너무 누추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로서 그 세계를 함께 문명화시키고 싶었고,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함께 성장해 가는 친구의 의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었다. 재근이는 이미 강력한 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세계는 굳이 내보이고,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을 만큼 강력했다.


    "몰라, 그냥 난 내가 결국엔 잘 될 거 같애" 어릴 적부터 재근이가 늘 하는 말이다.


    요즘따라 나는 재근이의 강력한 세계가 부럽다. 나의 세계는 요새 자꾸 무너져 내리기 바쁘다. 내 세계에 너무 많은 사람을 들인 걸까?, 내가 너무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탐한 걸까?


    아니 그보다 먼저, 나는 내 세계가 강력하다고 믿어본 적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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