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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Jul 06. 2021

시베리아 횡단 열차_엿새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의여섯 번째,그리고 마지막 밤의 기록


    기차에서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이 기차는 모스크바에 도착할 것이다.


자리에 누워 올려본 마지막 밤하늘


    이 긴 시간을, 이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버티나 싶어서 넣어왔던 영화도, 음악도, 책도 전부 한참 남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시간이 너무 빨리 흘렀기 때문이다.


    짧고도 긴, 이 시간 동안 나는 많은 추억을 만들었을까?


    누군가 내게 '기차 안에서 가장 특별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단언컨대, 기차 안에서의 특별한 경험이라곤 없었다. 도착하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서 몇 밤을 자야 하는 것, 한국에서는 느껴 볼 수 없는 침대칸 기차인 것을 제외하고는, KTX, 새마을호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저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기차에 올랐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기차 안에서 오랜 시간을 같은 사람들과 함께했다. 그리고 그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가끔은 그들과 카드놀이를 했고, 비록 인스턴트 식사일지언정 함께 나눠 먹곤 했다. 이걸 특별하다고 이야기할 순 없겠다. 하지만 이 특별하지 않은 시간들이 모여 특별함이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여행이라는 기분보다는, 산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기차에서 살았다.

    이 기차에서 살던 7일간의,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한 순간들은 평생 기억으로 남을 테다.


잠시 멈춰 선 기차


    몇 번 이야기 한 적 있지만, 나는 이동수단에서 사색에 빠지는 일을 즐긴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탔던 심야우등 고속버스에서 밤 시간 동안 사색에 잠겨 스스로를 돌아보는 순간을 가졌던 것 같이 말이다. 나는 그 덕에 장거리 이동을 힘들어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도 내게 그런 시간들을 많이 가질 수 있게끔 그런 분위기를 자주 만들어줬다. 하지만 내가 그 분위기를 충분히 즐겼는지는 의문이다. 심야버스의 그때처럼 사색에 빠졌던 순간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 그런 시간이 존재했음은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제의 기록처럼, 이 여행을 시작한 이유 그리고 이 여행을 통해 얻고 싶은 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반대편의 이 열차는 어디를 향해 달리는가


    같은 칸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객과 대화하는 시간을 좀 가졌다. 가벼운 대화였음에도 내가 이 이야기를 여기에 기록해두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다. 대화가 자체가 즐거워서만은 아니다. 이야기하다 보니 나의 여행 이야기를 하며, 그리고 내가 바라는 삶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에 스스로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지만, 어찌 됐건 현재에 내가 원하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 그걸 상대방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모습이 꽤 만족스럽다.

    나는 늘 나만의 생각, 나만의 고집, 나만의 가치관이 없어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본인의 가치관에 대해서, 본인의 믿음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할 때, 당당한 그들의 모습이 나는 늘 부러웠다. 나는 왜 저런 확고한 생각을 가지지 못하는가 스스로를 자책하곤 했다. 하지만 나도 나름 내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나 보다. 아니, 아니지 이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힘이 조금 자라났나 보다.


    오늘 읽은 책의 한 문구가 자꾸 떠오른다.

    ‘재능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재능이 있다고 믿는 게 중요하다.’

    ‘재능’의 자리에 다른 단어들을 가져다 넣어도 맞아떨어지는 말처럼 느껴진다.


    나도 내가 성장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성장하고 있다고 믿을 필요가 있겠다.

    그래 정말 나는 성장하고 있다.



여전히 달리고 있는 나의 기차


    기차는 여전히 모스크바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 거쳐 왔던 역들을 하나하나 전부 구글 지도에 표시하진 못했지만, 눈대중으로라도 조금 표시해보니, 꽤 멋진 그림이 완성되었다. 나의 북반구 일주 계획이 점점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자부심을 느껴도 될 만큼 말이다.

    물론 자부심이 강해지다 보니 발생하는 문제도 있다. 끝까지 이 챌린지를 완벽하게 완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르게 말해 '나는 정말로 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하겠다.'라고 다짐했다는 것이다. 아직은 가능, 불가능 조차 알지 못하지만 시도는 해봐야 이 맘이 풀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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