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성호 Jul 07. 2021

열차의 종착역_Moscow, Russia

첫인상

나를 모스크바까지 실어날라준 기차

    시베리아 횡단을 무사히 끝마쳤다. 사실 무사하다는 말이 무색하게, 계속해서 달리는 기차 안에서만 있었던 게 다다. 글쎄, 열차가 정차했을 때마다 바퀴에 낀 눈들을 그렇게나 털던데,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하며 잠시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날은 갈수록 따뜻해졌고 현재 여기 모스크바는 블라디보스톡에 비해 굉장히 따뜻하다.


    시베리아 횡단이 끝나는 게 너무 아쉬웠다.


    군생활이 끝나고 나서 제일 두려웠던 건, 이제부턴 내가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행동하던 기계에서 생각하고 사고하며 선택해야 하는 인간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두려웠다. 기차 여행이 끝나는 것도 그런 의미로 조금 두려웠던 것 같다. 기차 안에선 군인은 아니지만 내가 선택할 게 별로 없어서 책임질 것도 없었다. 자리는 정해져 있고 밥은 대충 끼니를 때워도 되며, 시간이 되면 자고, 시간이 되면 일어난다. 심지어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기차는 쉼 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니까 말이다.

    하지만 기차 여행이 끝나고 나니 또다시 선택할 거 천지다. 숙소도 골라 선택해야 하고, 먹거리 앞에서 남은 돈을 계산해가며 선택해야 하고, 어딜 갈지, 뭘 먹을지 다 선택해야 한다. 기차처럼 큰 목적지도 딱히 없다. 이처럼 전부 내가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일들만이 느껴진다. 그래서 기차에서 내리는 게 그렇게나 싫었나 보다.


    사실 지금도 싫다. 조금은 생각 없이, 누가 시키는 대로 다니고 싶다.




모스크바 역에서 숙소 찾아가는 길, 날이 흐리다.


    기차가 끝나고 나서 체크인을 하는 데 문제가 발생했다. 몰랐던 사실인데, 러시아에서는 입국 후 7일 이내에 거주 등록을 해야 한다. 원래 첫 숙소에서 거주 등록을 해주고 그와 관련한 증서를 줬어야 했는데 그러질 않았다. 주지 않은 숙소의 잘 못도 있지만, 몰랐어서 요구하지 못한 내 잘 못도 물론 있다. 잘못하면 나의 신분을 증명하지 못해서 체크인을 못 할 뻔했다. 다행히 숙소의 호스트가 여기저기 알아보니 기차에서의 기간은 뺄 수 있다고 했다. 그 기간들을 빼면 아직 7일 이내이기에 이번 숙소에서 거주 등록을 할 수 있었다.

    정보 없이 다니는 게, 한편으론 멋이라고 생각했다. 글쎄, 스포일러라는 표현이 적절할진 모르겠지만 정보가 없는 건 스포일러를 당하지 않고 여행지를 둘러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 정보 없이 다니는 게, 이렇게나 불안함을 낳을 줄이야. 불안함을 가시게 할 수 있을 만큼은 알아보고 다니는 게 좋겠다.


붉은 광장의 역사박물관과 볼쇼이 다리


    기차에서 씻질 못 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 한 거 같아서 조금 비싼 호스텔을 예약했다. 하지만 쉬기는커녕 씻고 바로 거리로 나와 크렘린 궁전 근처를 둘러봤다. 다니며 붉은 광장도 보고, 이런저런 동상들, 그리고 내일모레 스스로에게 주는 생일선물로 예매해둔 발레 공연의 공연장, 볼쇼이 극장도 보고 돌아왔다. 오늘의 여행은 모스크바 맛보기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볼쇼이 공연의 드레스코드가 걱정이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있을 줄이야. 내가 가진 옷은 여행자스러운 것들밖에 없은데, 옷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정말 괜찮은 옷을 백화점에서 사고 택을 떼지 말고 입고 환불이라도 해야 하나...? 호스트의 옷을 빌려 입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얼마 전 알게 된 '카우치 서핑'을 이용해 봤는데, 답변이 오는 호스트가 없다. 카우치 서핑이라고 다 쉬운 게 아닌가 보다. 오히려 히치하이킹이 더 쉽네.

매거진의 이전글 시베리아 횡단 열차_엿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