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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Jul 08. 2021

관광과 여행_Moscow, Russia

내게의미 있는일들

    북위가 높아질수록 해가 짧아지는 거던가? 지구과학 시간에 배운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이곳은 낮이 너무 짧다. 아침에 일어나서 정신이 말짱히 깨있는데도 밖이 어두워 이걸 더 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들고, 조금만 돌아다녀도 금방 어두워져 숙소로 돌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의 연속이다.


모스크바 강과 강변도로, 아마도 퇴근시간인가 보다.


    모스크바에서의 시간을 돌아보면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일들을 했던 시간인 것 같다.


    일부러 의미 있는 일들을 하려고 한 건 아니다. 나는 한 도시의 랜드마크를 가보는 일을 굉장히 즐긴다. 이는 나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인데, 아쉽게도 모스크바의 랜드마크로 불리는 크렘린 궁은 깔끔하게 포기해야 했다. 입장료가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나의 지적 호기심을 얼만큼 해소해 줄지도 모르는 곳에 지불하기엔 너무나도 큰돈이었다.


    크렘린궁을 반 강제로 포기하고, 대신에 의미 있는 일들로 시간을 채우려 했다.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해서 봉사 활동을 한다던가 사회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행위를 했다는 뜻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것들을 했다는 말이다. 엊그제를 예로 들면, 나는 '맥도날드'라는 브랜드를 굉장히 좋아하고 즐겨먹는 사람이다. 각 도시들의 맥도날드에 일부러 꼭 한 번씩 들러서 그 나라만의 메뉴가 있으면 먹어보려고 할 정도다. 그런데 이곳에 이런 내게 꽤 의미가 있는 맥도날드가 있다 하여 그곳에 다녀왔다. 바로 소련 시절 탄생한 맥도날드 소련 1호 점이다. 냉전 시대 속에서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맥도날드가 사회주의 끝판왕 나라 소련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이라니, 이건 맥도날드 역사에도 큰 의미가 있는 곳이고, 그곳에 다녀오는 것은 맥도날드를 좋아하는 내게도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크렘린 궁을 대신할 관광지를 찾다가 알게 된 스타니슬라브스키와 관련한 곳들도 내게 의미 있는 곳이었다. 스타니슬라브스키는 러시아의 희곡작가로서 연극을 공부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람이다. 심지어 함께 연극을 공부했던 친구들과의 단체 카톡방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신타니춘라브호키'로 지어서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 또한 연극을 공부했기에 러시아에 입국했을 때부터 그를 떠올렸다.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나라에 온 게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를 얼마나 위인으로 생각하며 공부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배고픈 연극학도의 시절을 거친 내게 꽤 의미 있었기에, 그리고 그와 관련한 물건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이 모스크바에 있다기에 한 번 가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곳은 리모델링 중이라 들어가 볼 순 없었고, 길을 걷다 그의 동상을 우연히 발견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만난 그의 이름이 꽤 반가웠으니까. 그 동상과 괜히 사진을 찍어서 신타니춘라브호키 톡방에 올리며 친구들과 옛 추억을 상기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맥도날드 소련 1호점 /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동상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것은 생일이 일주일 넘게 남았지만, 스스로에게 생일 선물을 주었다는 것이겠다.


    예전에 고등학교 1학년 때 생일 선물로 어머니가 공연을 예매해주신 적이 있다. 잠실 '샤롯데 씨어터'에서 하던 뮤지컬 <맘마미아>였는데, 그 순간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굉장히 좋게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생일날이면 공연을 보는 것이 일종의 관습처럼 느껴졌다. 물론 매년 공연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생일날엔 공연이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나의 생일이 마침 얼마 남지 않았었다. 그리고 우연히도 나는 이 시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볼쇼이 발레단, 볼쇼이 극장이 있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근 몇 년간 생일날에 맞춰 공연을 본 기억도 없고, 스스로에게 생일 선물을 했던 기억도 가물가물하니 만약 모스크바에서 공연을 본다면 스스로에게 아주 의미 있는 생일 선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라면 비싼 돈을 주더라도 충분한 의미가 있으니 볼만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티켓값이 저렴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볼쇼이 발레단의 발레 공연, <코펠리아>를 보고 왔다.

볼쇼이 발레단의 <코펠리아> / 극장 내부 모습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 실제로 발레를 잘 모르기도 해서 공연을 평가할 순 없지만, 공연의 질을 떠나 너무 기분 좋게 공연을 봤다. 이 정도면 정신병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무대 위에서 춤추는 사람들이 내게 ‘생일 축하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고, 나의 여행을 응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커튼콜 때 관객들이 배우들에게 보내는 박수가 나에게 보내는 박수는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정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마 <코펠리아>는 평생 동안 내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누군가 생일에 대해서 물어오면 좀 쿨해 보이고 싶어서 ‘생일이 뭐 대수야?’하며 말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엄청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그런 내게 이번 생일은 정말 완벽한 생일이었다. 여행 중에, 그것도 해외에서, 그것도 무대 공연을, 그것도 볼쇼이의 공연을, 그것도 볼쇼이의 뮤지컬이 아닌 전통 중의 전통 발레를 봤다는 게 내게 너무 의미 깊은 일이다. 정말 행복했다. 한동안은 이 행복감으로 여행을 이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성 바실리 대성당


    '관광'과 '여행'에는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관광은 조금 더 학습과 관련한 성격을 많이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행위라고 해야 할까? 더 배우기 위한 행위를 관광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여행은 배움을 떠나서 단순한 구경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구경을 통해 마음의 양식을 키운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로서 모스크바에서의 시간은 정말 말 뜻 그대로의 여행이었다. 어쩌면 그냥 단순한 구경처럼 보일 수 있는 행위들이, 사실은 내게 큰 의미가 되는 행위들이었고, 그를 통해 마음의 양식을 가득 채웠다. 어쩌면 이게 진정한 의미로서의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매일이 지금 같을 순 없겠지만, 한 가지 바람을 갖자면, 이런 순간들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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