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구석이 필요하다.
팍세를 벗어나 다음으로 가볼 곳은 라오스의 중부지방 타케크다. 마찬가지로 팍세 이후의 계획도 없었으나, 호스텔 주인의 추천을 받아 다음 목적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또 한 번 장거리 버스를 탔다. 라오스에 있는 대부분의 버스들은, 한국에서 수입된 중고 버스들이다. 혹시나 내가 탔던 버스가 여기에 와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외관은 더 오래된 버스 같아서, 내 어릴 적이 아니라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대학시절, MT를 떠나기 위해 탔던 버스임은 분명해 보인다. 괜히 과거로 여행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내 여행엔 이동이 많이 예정되어있다. 그럴 만도 한 게, 베트남에서부터 시작해서 유럽까지, 또 유럽에서 멈추지 않고 바나 건너 미국까지 전부 육로로만 다니는 것이 목표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교통편을 타며,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확신’이다. 생각해보면 이만큼 확신 없이 교통편을 이용하는 건 여행에서 뿐일 거다.
확신의 크기가 얼마만 한 지가 관건이지만은, 한국에서는 대중교통을 타면 대개 나도 모르는 확신이 있다. 대부분은 ‘내가 아는 길’이니까. 이 버스 혹은 지하철을 타면 내가 원하는 곳에 간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안다. 혹시나 내가 모르는 길, 처음 타 보는 노선이더라도, 나는 분명 그곳에 가는 티켓을 샀으니 갈 거라는 확신이 있을 테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이정표를 살펴가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여행 중엔 늘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버스나 지하철에 올라탄다. 이 노선은 내가 모르는 노선이라 확신이 없을뿐더러, 나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한다. 티켓을 구매할 때 ‘혹시나 내가 발음을 잘 못해서 못 알아 들었던 거면 어떡하지?’ 따위의 확신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들이 너무 많다. 목적지를 여러 번 머릿속으로 외운다. 누군가 질문하는 투로 말을 걸어오면 ‘어디에 가니?’라는 물음으로 인식하고, 목적지를 대답 삼아 대꾸한다. 목적지만을 들을 귀를 열고, 목적지만을 이야기할 입을 연다. 그 나라 인사말보다 목적지가 더 기억에 남는 이유일 거다. 그렇게 그들로부터 끄덕임을 들으면 그게 확신의 전부가 된다. ‘어디에 가니?’ ‘타케크’ ‘(끄덕끄덕)’ ‘(아 타케크에 가는 버스가 맞나 보다)’
직행버스라 해서 탑승했는데, 중간에 자주 멈춘다. ‘도착했나?’, ‘내려야 하나?’하며 움찔한다. 핸드폰은 지도 속 현 위치를 확인하느라 바쁘다. 버스가 다시 한번 멈춘다. 이번엔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기사 아저씨가 일어나 뒤를 돈다. 그러고는 큰소리로 외친다. ‘타케크! 타케크!’. 내가 속으로 그렇게 외우던 그곳이다. ‘도착인가?’ ‘지도상으론 아직 멀었는데...?’. 알고 보니 중간에 버스를 갈아타야 타케크에 갈 수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갈아타는 것 같다. 그토록 외우던 목적지를 외치는 목소리를 따라 버스를 갈아탄다. 옆자리 아줌마의 끄덕임으로 맘이 한결 편해졌는데, 갈아타니 또 확신이 사라진다. 갈아탄 이 버스는 정말 타케크까지 가는 걸까?
대학시절 연기를 공부할 때 실습시간 교수님이 해주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많이 준비해서 무대 위에서 믿을 구석을 많이 만들어둬라. 그래야 행동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실제와 최대한 비슷한 소품을 많이 준비하라고 해주셨던 말씀이다. 소품이 실재해야 관객은 물론,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사람들도 소품이 진짜라 믿기기에 행동이 자연스러워진다. 실재하는 소품이 무대 위에서의 믿을 구석이다.
혼자 여행을 하면 믿을 구석이 부족할 때가 많다. 함께 여행을 준비하며 정보를 같이 찾아나간 친구가 있어서 더블 체크된 정보도 없다. 내가 찾아낸, 내가 가진 정보가 전부다. 그 정보는 믿을 수 있는 걸까? 여기서 버스를 타면 간다던데, 갈아탄다던데, 여기서 내려야 한다던데 같은 것들 말이다.
어찌 됐건 타케크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내가 수집한 정보들을 믿지 못해서, 확신하지 못해서 불편한 버스여행이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나는 나를 얼마나 믿는 걸까? 내가 수집한 정보들이 그래도 꽤나 확신할 수 있는 정보들이 맞는 걸까? 조금 더 확신의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