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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Jul 20. 2021

크리스마스_Sinaia, Romania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새벽같이 하루를 시작해, 부쿠레슈티를 떠나 브라쇼브로 옮겨 왔다. 사실 부쿠레슈티와 브라쇼브가 멀진 않았다. 기차도 매시간 있어서 언제고 이동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시나이아'라는 마을에 들러 '펠레슈 성'을 구경하는 일정을 생각하다 보니 새벽기차를 타는 것이 불가피했다. 또 마침 그 시간대의 기차가 제일 저렴했다. 나로선 선택권이 없었던 셈이다. 덕분에 밤 열두 시가 넘어 브라쇼브에 도착하긴 했지만, 나는 시나이아에서 늘 보고 싶었던 유럽의 모습을 보았다.


시나이아 역 / 시나이아 마을의 풍경

    나는 유럽에 처음 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늘 대도시 위주의 여행을 했었다. '나도 가봤다!'는 소속감을 위해서 남들이 많이 간다는 런던, 파리, 로마 같이 유럽을 대표하는 대도시들로만 여행 루트를 계획했던 것이다. 물론, 그 도시들이 주는 느낌도 좋지만, 속으로는 늘 자연과 함께하고 있는 유럽의 작은 마을을 갈망했다. 그리고 그 속에 숨어있는 유럽의 여러 성들 또한 가보고 싶어 했다. (항상 성들은 도시와 멀리 떨어진 자연 속에 있더라) 그런데 이번에 ‘시나이아’라는 마을은 딱 내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유럽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산간마을로서 자연과 함께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유럽의 아름다운 성 중에 하나로 꼽히는 '펠레슈 성'도 있었다.

    시나이아 역에서 기차를 내리자마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무엇보다 맑은 공기 때문이었는데, 여긴 그 복잡한 부쿠레슈티와 고작 두 시간 남짓 떨어져 있을 뿐임에도 공기가 너무 맑았다. 또 도심의 높은 빌딩들은 온데간데없고, 동화 속에서나 볼 것 같은 아기자기한 유럽의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마을의 골목길에서 파트라슈가 뛰어나오고, 마을 뒷산의 들판에서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열창하는 여인이 있을 것만 같은 곳이었다. 펠레슈 성도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마을이 주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에 비할 것이 못 되었다. 물론, 크리스마스라서 티켓 오피스가 열지 않은 탓에 내부를 둘러보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말이다.


펠레슈 성


    시나이아가 주는 모습에 반해서, 마을과 펠레슈 성을 돌아다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뒷산까지 올라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이 많이 남았던 덕분도 있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 가장 저렴한 기차를 예약하려고 하다 보니 제일 늦은 시간대의 기차를 예약했는데, 이 것이 내가 시나이아에서 보내는 시간을 연장시켜줬다. 그렇게 펠레슈 성을 넘어 뒷산을 트레킹 하기 시작했다. 사실 트레킹이라는 말은 거추장스럽긴 하다. 이곳은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추천 코스를 그려놓은 지도가 있는 곳이었지만, 사실 나는 그냥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기 까지만 가보자!', '아니 저기는 더 예쁜데?' 하면서 걸었던 트레킹이 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샌가 나는 숲 속을 걷고 있었다. 이름을 모르는 그 나무, 북유럽 하면 떠오르는 그 나무, 그래 쉽게 말해 사방이 크리스마스트리들 천지인 숲이었다. 마치 산타마을이라도 온 것처럼 사방이 크리스마스트리로 가득했다. 맑은 공기 탓이었을까, 예쁜 나무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오랜만에 트레킹을 해서일까 기분이 너무 좋았다. 추운 줄도 모르고 산을 오를 만큼. 물론 중간중간 길을 잃기도 했고, 나를 지나치는 어떤 사람들에게 위로 더 올라가면 곰을 만날 거라는 말에 무서워하기도 했지만, 트레킹을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아름다운 모습들이 나왔다. 시나이아 마을의 전경을 볼 수 있는 건 덤이고, 심지어 산을 올라갈수록 눈이 쏟아졌는데, 그게 정말 아름다웠다. 진정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느낌이랄까, 하얗게 눈 덮인 나무 위로 하얀 눈이 쏟아져 내렸다. 이것이 정말 말 그대로 설국이구나.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참 꿈같은 하루를 보냈다.  


크리스마스 트리들




    크리스마스다. 안 그래도 요즘 가는 마을마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한창이었다. 부쿠레슈티에 머무는 동안에도 인민궁전 중심으로 크리스마스 마켓이 크게 열려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샹그리아를 사 마시며, 아는 캐롤이 울려 퍼지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인민궁전 앞 크리스마스 마켓


    크리스마스를 맞아 바지를 잃어버렸다. 도대체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고 그랬는지, 부쿠레슈티의 호스텔에서 샤워를 하는 동안 잠깐 벗어 놓은 바지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다. 중국에서 날이 너무 춥길래 따뜻한 바지를 하나 새롭게 장만한 것이었는데, 하필이면 헌 바지가 아닌 새로 산 그 바지를 잃어버렸다. 힘닿는 데까지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결국 '나는 왜 이렇게 내 물건 간수를 못할까'하며 한참을 자책하고 있는데, 문득 '이제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차츰 가벼워졌다. 체념이 주는 그런 평온함을 깨달은 걸까?

    하루는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먹을 생각으로 큼지막한 샌드위치를 샀는데, 그 샌드위치 가게 옆에 아주 맛있어 보이는 피자를 팔고 있는 피자집이 있었다. 충동적인 소비를 굉장히 지양하지만, 크리스마스니까라는 변명으로 피자도 한 조각 포장하고 있었는데, 루마니아에 그렇게나 많다던 집시 한 명이 손님으로 와 있었다. 그는 누가 봐도 구걸로 얻은 꾀죄죄한 동전으로 피자를 한 조각 포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피자를 포장해서 각자 갈길을 가려는데, 그가 대뜸 내게 피자를 바꿔먹자고 했다. 본인의 피자는 치즈 피자니까, 나의 페퍼로니 피자와 바꿔먹으면 두 가지 맛을 느낄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나는 순간 그가 집시라는 생각에 꽂혔다. 분명 씻지도 않았을 테고, 더러운 그가 내가 곧 먹을 피자를 건든다는 생각에 순간 결정을 망설였다. 그런데, 그때 그가 갑자기 본인은 더러우니까 자기가 베어 물었던 쪽 말고 반대쪽을 직접 뜯어가고, 내 것 또한 내가 직접 뜯어서 달라고 말했다.

    더러운 건 그가 아니라 나의 마음이었나 보다. 더러운 건 그가 아니라 나의 선입견이었나 보다. 나는 그의 충격적인 말에 잠시 황당하여있다가 결국 피자를 나눠먹었다. 집시 덕분에 나 또한 치즈피자의 맛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게다가 삶의 큰 교훈까지 얻은 것 같은데, 그는 나더러 "You are good guy, Good luck, Merry christmas"란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부쿠레슈티에서의 버스킹 공연


    끼워 맞추기지만 크리스마스를 맞아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마스 하루 만에 일어난 일들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라는 수식어가 붙을만한 일들이 많았다. 숲길을 산책하며 행복했던 순간, 바지를 잃어버리며 불행했던 순간, 그리고 집시를 통한 깨달음의 순간까지.

    이제 만으로 딱 28년을 살았는데 3번의 크리스마스를 해외에서 맞았다. 예수님의 탄생일이 내게 큰 의미가 있진 않겠지만 지난날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기에 참 적절하다. ‘지난 크리스마스 땐 이랬지’ 하며 현재의 나의 모습이 그때에 비해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생각해보는 거다.

    지난 크리스마스부터 이번 크리스마스까지 수많은 날이 흘렀고, 그 수많은 날동안 더 많은 깨달음의 순간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 지난 크리스마스 때의 내 모습보단 확실히 무언가 성장하긴 했을 테다. 생각의 수량도 많아지고, 깊이도 더 깊어진 느낌이다. 생각이 많은 게 가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조금 더 스스로를 진중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이건 좋은 변화다.


    그리고 처음으로 홀로 맞는 크리스마스가 생각보다 외롭지 않은 걸 보면 고통에 많이 둔해졌나 보다. 맷집이 강해진 셈이니 이 또한 성장이라 봐도 되겠다.


    이쯤 되니 내년 크리스마스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내년에도 해외에 있으려나. 괜히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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