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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Jul 27. 2021

사라예보의 이야기_Sarajevo, Bosnia

역사의 산 증인

    아침부터 난리법석이었다. 사라예보를 구경하려고 준비해서 나가려는 찰나, 즐겨 입는 후드 집업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이번엔 내 잘 못이 아니다. 이건 분명 누가 훔쳐간 것이다. 나는 그저 내 침대 위에 벗어 뒀을 뿐인데, 후드만 쏙 사라진 걸 내 잘못이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아니 도대체 왜 자꾸 옷을 훔쳐가는지 모르겠다. 어디에다가 팔 것도 아니고, 결국 자기들이 입으려고 가져가는 걸 텐데, 남이 입던 걸 입고 싶은 걸까? 아니, 뭐 명품 브랜드의 후드 집업이면 내가 이해라도 하겠는데, 손목은 늘어날 대로 늘어나고 실밥도 다 터진 후드 집업인데, 도대체 이걸 왜 훔쳐가는 걸까?

    행복은 내 안에서부터 오는 것이고, 잡념과 집착이 없어야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 그러시던데, 부처님도 과연 그러셨을 수 있을까? 부처님이 입던 후드 집업이 누군가에 의해 사라져도 평안을 찾으실 수 있으셨을까? 후드 집업에 집착 하지 않으셨을 수 있을까? 이렇게나 날이 추운데? 껴입을 옷이 필요한데?

    아무튼 찾긴 찾았지만 (내 아래층 침대를 쓰는 사람이 입고 있는 걸 발견하고 달라고 하니 순순히 내줬다. 추워서 잠깐 입었다나 뭐라나)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고.


숙소의 한쪽 벽에 쓰인 한국어 낙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믿는다. 그래서 난 새로운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공부까지는 아니지만, 이 도시는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미리 알아보고 가려고 하는 편이다.

    이곳 사라예보는 세계사 시간에 많이 들었던 사라예보 사건을 통해 알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었던 곳, 잊히려야 잊힐 수 없는 크나큰 사건으로 역사에 박제가 되어버린 도시다. 나는 우연히 길을 걷다가 그 역사적 장소를 가보게 되었다. 그곳의 건물 외벽에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라며 팻말이 붙어 있었는데, 이를 보고 있으니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1차 세계대전이 내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백 년 전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을 그 건물 앞에서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명의 사상자를 낳은 세계대전의 불씨가 붙었다니 괜히 기분이 묘해지는 것이다. 그 기분을 어떻게 말로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시간의 흐름이 문득 체감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왼쪽사진의 다리 '라틴교' 앞에서 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타올랐다.

    

    그렇게 사라예보를 산책하고 있는데, 우연히 길거리에 전시되어있던 한 사진이 맘에 들었다. 그 사진의 매력에 이끌려 갤러리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엔 사진전이 한창이었다. 잃어버린 후드 집업 탓에 날이 더욱 춥게 느껴지기도 했고,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는 일을 즐기고도 있으니, 재밌는 구경거리가 되어주리라 생각하며,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그저 사진 구경만을 위해 그 갤러리에 들어갔다.

    사진전의 제목은 <11/07/95>였다. 나는 사실 제목을 대충 보고 '11년도 언저리에 일어난 일이겠지', '1차 세계대전, 그리고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이야기겠지'하며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그 사진전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제목을 다시 보게 되었다.


11/07/95 = '95년 7월 11일'

맞다. 이 사진전은 '보스니아 내전'과 관련된 전시였다.


    불과 20여 년 전 일이었다. 이곳 사라예보엔 '사라예보 사건'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보스니아 내전' 또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에 '보스니아 내전'을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다. '보스니아 내전'이라는 말이 몇 번 발음해 본 것 같은 익숙함이 드니까 말이다. 분명 그땐 '음 ~ 나랑은 상관없어', '자기네들끼리 싸운 내전인데 뭐'하며 가벼이 넘어갔을 것인데, 사진전을 보고 난 후론 생각이 싹 바뀌었다.

    사진전엔 특히나 '스레브레니차 학살사건'을 다룬 사진들이 많았는데, 이는 참 끔찍한 기록이었고, 역사였다.

    예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다녀오며 들었던 가이드 멘트가 잊히질 않는다. '당신은 역사를 기억하는 사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참혹한 역사를, 전쟁을 기억한다는 게 한편으론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아픔은 빨리 잊어버리고 새 출발을 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런 참혹한 아픔을 기억하고 있어야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치 않게끔 방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 주위에서 누군가를 학살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런 아픔의 역사가 또다시 반복되려고 할 때, 보다 옳은 소리를 내는 것에 힘을 실어 줄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많은 힘을 모아, 많은 이들의 무고한 생명을 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라예보의 다양한 건물들

    참 작은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역사가 많은 곳이다. 그리고 역사가 생각보다 나와 가까운 역사여서 왠지 모르게 더 의미 깊다. 역사적 장소에 방문한다는 것이 이러한 재미가 있구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왠지 모를 그 미묘한 기분, 그 역사적 사건부터 지금까지의 세월이 문득 찐하게 체감된다거나, 나 또한 한편으론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거나,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이 꽤나 재밌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요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멀티버스'라는 개념이 나온다. 나는 이를 '나와 동시간대에, 다른 선택을 했던 수많은 '나'가 다른 차원의 지구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개념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맞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혹,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세상이 있다면, 그리고 보스니아 내전이 일어나지 않은 세상이 있다면, 그곳의 모습은 어떨까 문득 궁금하다. 그곳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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