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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Jul 28. 2021

추억 사기_Split, Croatia

노을, 미드나잇 인 파리, 글레디에이터, 왕좌의 게임

    크로아티아 스플릿으로 넘어오는 동안 창밖으로 펼쳐진 모습은 별세계였다. 여태 발칸반도의 우중충한 모습만 봐왔던 탓일까. 이곳 스플릿이 휴양지는 휴양지인가 보다. 정말 아름답다. 모처럼 패딩을 입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날도 따뜻했고,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 계속되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보였던 스플릿 항

    우크라이나를 시작으로 근 한 달 정도 발칸 반도를 여행하고 있는데, 도시가 바뀔 때마다 도시의 얼굴이 달라지는 게 재밌다. 도시의 얼굴은 확실히 역사를 담고 있나 보다. 소련의 역사를 담고 있었던 우크라이나와 몰도바는 굉장히 차가운 느낌이었으며, 공산주의 속 독재로 시름했던 부쿠레슈티는 중세 유럽의 아름다움과, 공산주의의 산물들이 만나 조화를 이룬 게 참 묘한 느낌을 만들었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아픔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베오그라드와 사라예보가 왠지 모르게 허름해 보이는 느낌을 주었던 것까지, 이렇게 각자만의 이야기를 통해 각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게 흥미롭다.

    인터넷 서치를 조금 해보니, 이곳 스플릿은 로마 황제가 은퇴를 위해 궁전 겸 요새를 만들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스플릿 또한 로마의 역사를 담아, 여태의 다른 도시들과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마 시대의 유산들이 왜 그렇게나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인지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확실히 이곳 스플릿이 정말 아름답긴 아름답다. 마침 스플릿에 머무는 동안 날이 좋아서 매일의 노을이 아름다웠고, 날씨도 춥지 않아, 여느 도시처럼 걸어서 도시를 산책할 때, 참 기분 좋게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스플릿항의 노을

    첫째 날엔 숙소에 짐을 풀고 해 질 녘 즈음 나와 도시를 산책했다. 목적지는 스플릿의 시내라고 할 수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거리'까지 가는 것이었는데, 가는 길에 만난 '스플릿 항'에 아름다운 노을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꽤 배가 고픈 상태라 식당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이 노을을 그냥 지나 칠 수는 없었다. 근처 가게로 뛰어들어가 아무 맥주를 하나 급하게 사서 '스플릿 항'에 앉았다. 그리고는 움직일 수 없었다. 노을에 매료되어 한참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옆에 따 놓은 맥주를 홀짝일 뿐,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려는 찰나가 아까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둘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해가 다 떨어지고 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맥주 탓이었을까, 멋진 노을 탓이었을까, 기분이 몽글몽글 해졌다. 근처에서 피자 한 조각을 사 먹는 것으로 허기를 달래고,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거리를 산책했다. 그런데 마치 내가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인 공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고, 나는 그 속의 주인공이 되었다. 문득 그 주인공에게 술 한잔을 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왠지 오래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바에 들어갔다. 이왕 스스로에게 술 한잔 사주는 김에 좋은 술로 사주자는 생각으로 위스키를 주문했다. 그것도 허세를 가득 담아 언더락으로 말이다. 이 타이밍에 주인공이 고독을 삼키며 책까지 읽어주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될 텐데, 아쉽게도 종이책은 아니지만 가방에 아이패드가 있었다. 그렇게 가방에서 주섬주섬 아이패드를 꺼내(여기서 좀 깬다) 좋아하는 책을 읽었다. 위스키가 다 떨어지면 맥주를 주문하며 바가 문을 닫는 시간까지 한참을 앉아 있다가 왔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밤


    둘째 날엔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나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 팬이다. 그렇기에 이곳 스플릿에 <왕좌의 게임> 촬영지가 있다는 사실은 나를 흥분시켰다. 어제 잠깐 들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지하도 드라마 촬영지였으며, 숙소에서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클리스 요새'도 <왕좌의 게임> 촬영지였다. 바로 그 '클리스 요새'에 가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물론 스플릿 근처의 '두브로브니크'라는 도시가 <왕좌의 게임>의 주요 촬영지임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이미 관광지로서 많이 발달한 터라 물가가 비싸단 이야기를 듣고 가보는 것을 포기했는데, 마침 스플릿에도 촬영지가 있다니, 이는 <왕좌의 게임> 팬으로서 포기할 수 없었다.

    클리스 요새는 숙소로부터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러나 그곳에 가는 버스는 많지 않다. 고작 30분 거리인데, 하루에 3대만 운행한다고 한다. 나는 사실 버스시간이 다양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했는데, 그만 3대 중 1대의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덕분에 3시간을 트레킹 해서 '클리스 요새'에 가야만 했다. 하지만 '클리스 요새'까지 걸어가는 길의 모습도 정말 끝내줬다. 단순히 아스팔트 길을 따라가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산을 올라야 했고, 계곡을 건너야 했다. 조금 늦게 '클리스 요새'에 도착한 사실은 아쉽지만, 스플릿의 또 다른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기에 3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클리스요새까지 가는길

    원래의 나라면 입장료가 아까워 '클리스 요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 이야기했듯이 나는 <왕좌의 게임> 팬이고, 이곳에 들어가 보지 않으면 팬으로서의 수치다. 거금을 들여 입장했지만, 대신에 돈이 아깝지 않게 '클리스 요새의 모든 곳들을 샅샅이 훑었다. 드라마 속 장면을 오버랩해서 찍어보기도 하고,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용과 합성을 해주는 사진 기계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예상보단 비싼 입장료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의 로케이션을 가볼 수 있다니, 이 정도면 뭐, 성공적인 관광이다.(물론 입장료는 고작 12,000원 밖에 안 한다.)


클리스 요새
<왕좌의 게임> 노예도시 미린

    다시 스플릿으로 돌아갈 땐 다행히 버스를 타고, 30분도 걸리지 않아 스플릿 시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스플릿 시내는 어제 봤던 밤 시간대의 모습과 또 다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어제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등장하는 거리처럼 보였다면, 오늘은 <글래디에이터>에 등장하는 거리처럼 보였다. 아마 로마시대의 유적인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때문일 것이다. 마치 그 로마시대의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어슬렁어슬렁 궁전 일대를 구경하다가 궁전의 지하에 있는 박물관에 들어갔다.

    알아보니 이곳은 역사적으로 꽤 의미가 깊은 장소였다. 과거에도 '큰 도시'였고, 그 도시가 현재 시대까지 이어져 '큰 도시'인 몇 안 되는 지역에 남아있어서, 가장 보전이 잘 된 고대 로마의 황제의 궁전이라고 한다. 유명한 전시품이 있다거나, 전시품이 많다거나 하는 그런 박물관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 깊은 궁전의 유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의미로서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이곳 역시 <왕좌의 게임> 촬영지였기 때문이다. 무려 칼리시(<왕좌의 게임>의 주인공)가 용을 가둬뒀던 ‘용 유치장’이었던 곳이며, 처음으로 용으로 화형을 진행했던 곳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던데, 나는 <왕좌의 게임>을 아는 만큼 이곳을 바라본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모습
드라카리스


    스플릿에 머무는 동안 계속해서 기분이 좋았다. 우연히 아름다운 것을 봐서, 또 좋아하는 걸 해서 그랬을 테다. <왕좌의 게임>을 구경하느라, 그리고 기분 좀 내느라 불필요한 소비를 한 것 같아서 사실 마음 한편이 조금 불편하긴 하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마따나, 후회하지 않으련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추억거리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2박 3일 스플릿에 머무는 동안 숙소비와 교통비를 포함하여 7-8만 원 안으로 해결한 것 같다. 이 정도 금액에 이렇게나 많은 추억거리를 샀다는 것은 아주 좋은 거래다.


    기분이 좋아 글이 너무 길다. 크로아티아를 너무 편애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지나온 다른 도시들한테 괜히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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