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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Aug 10. 2021

잔잔한 물결소리_Ljubljana,Slovenia

조용하디 조용한

I � SLOVENIA


    크로아티아를 지나,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로 넘어왔다.


류블랴나의 밤거리

    이곳은 정말 도시가 어쩜 이렇게 조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너무나도 평화로운 곳이다. 내 발걸음이 시끄러울까 봐 괜스레 발걸음마저 조심스럽게 걷게 되는 곳이다. 처음 여행을 계획하며 생각지도 못했던 이곳의 한적함이 아주 맘에 든다.

    누군가 내게 인생 영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인셉션>을 꼽는다. 나는 이 영화를 로맨스 영화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로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주인공 맬과 코브가 자신들만이 사는 둘의 세상을 창조해내고 그곳에서 둘이서만 살아가는 장면이다. 그런데, 문득 이 류블랴나가 그런 도시처럼 느껴질 정도다. 도시가 워낙 조용하다 보니, 누군가와 이 거리를 함께 걷는다면, 둘만의 세상처럼 느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류블랴나 성에 올르면 보이는 뷰


    사실 나쁘게 이야기하면 할 일 없는 도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도착한 날 저녁에 짐을 풀고 잠깐 둘러본 류블랴나의 모습이 사실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한적함이 정말 맘에 든다. 덕분에 슬로베니아의 일정이 길어졌다. 류블랴나는 그저 거쳐가는 도시로 삼고, 곧장 부다페스트로 넘어가 야경을 만끽할 생각이었는데, 생각만 해도 복잡스러운 부다페스트의 시간 이전에, 조용하게 힐링 속 힐링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났으니, 잠깐 만끽하는 것도 좋겠다.


프레셰렌 광장의 낮과 밤


    브라쇼브의 에서 머물렀던 숙소가 굉장히 좋았었다. 조식이 포함되어 있는 점, 그리고 인테리어와 그 공간이 주는 안락함이 너무 맘에 들었는데, 이곳 류블랴나의 숙소도 마찬가지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모든 식재료를 맘대로 가져다가 먹으란다. (먹는 걸 주는 숙소가 왜 이렇게나 좋은지 모르겠다.) 아침으론 간단한 토스트, 그리고 저녁으론 나름 요리랍시고 파스타를 만들어 먹곤 했는데, 주방에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돌이켜보면, 뭔가 여행다운 여행을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아진다. 물론 내가 한 거라곤 면만 삶았을 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숙소가 좋았던 탓일까. 좋은 친구를 만났다. 참 붙임성 좋은 중국인 친구를 만나서 밤새 수다를 떨다가 잠들기도 했고, 내 침대 아래층에 지내던 형근 씨와 만남도 반가웠다. 형근 씨 덕분에 슬로베니아라는 나라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는 이미 이곳에 대한 정보를 가득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팬으로서, 드라마의 촬영지 중 하나인 '블레드 호수'에 가보려고 이곳에 머무는 중이라고 했는데, 덕분에 일정을 맞춰 형근 씨와 함께 류블랴나 근교의 '블레드 호수'를 다녀올 수 있었다.


블레드 호수에 비친 블레드 성


    '블레드 호수'는 조용한 나라 속 조용한 도시, 게다가 그런 도시의 근교에 위치한 소도시 속의 호수라서 더 조용하고 더 평화로웠다. 오그라드는 표현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그렇게나 잔잔한 호수의 물결소리가 들릴 정도라고 해야 할까? 그 분위기에 심취해서, 그 평화로움에 매료되어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카페로 달려가 야외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게다가 에스프레소로 마셨다. (커피는 분위기로 마시는 음료라고 하니까 이럴 땐 에스프레소다.) 덕분에 모처럼 진짜 여행을 한 기분이 든다. 여태까진 도시에 머물며 그저 그 도시를 속속들이 걷는 게 전부였고, 그걸로 만족하곤 했는데, 버스를 타고 근교까지 나와서, 멋진 분위기에, 멋진 풍경까지 감상하니 또 느낌이 새롭다.

    절벽 위에 만들어진 블레드 성에 오르면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100평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섬과 호수의 조화가 굉장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성에서 내려와 호수변을 따라 걷다 보면 한국의 흔한 호수공원들과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의미부여의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래서 인생은 가까이 서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는가 보다. 내가 여태 만난 괴로움과 장애물, 슬럼프들도 멀리서 보면 희극이겠지. 행복 속 작은 불행이겠지. 그래, 풍요 속 빈곤이겠지.


블레드 호수와 나


    슬로베니아에 도착해서부터 이상하게 쓸 말이 별로 없다. 처음엔 그저 도시가 워낙 조용하니 한 일도 없고, 그래서 쓸 말이 없는 거다 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전 보다 맘이 많이 편해져서 쓸 말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전문적인 작가는 아니지만, 희한하게 맘이 불안할 때 글이 더 잘 써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쓰는 글들은 나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인 것이 크기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고, 생각이 복잡해야 글이 나온다. 그러므로 괴로울수록 글을 양산해 낼 수 있는 것인데, 마찬가지로 이전까지의 여행은 괴로움이 많아 그를 에너지원으로 삼아 참 많이 써댄 것 같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 괴로움이 조금 덜한지 별로 할 말이 없다.


류블랴나성과 건물들


    크로아티아 때 맛있는 맥주를 먹은 이후로 아직까지 하루에 적당량의 알코올을 섭취하는 행위를 이어가고 있다. 형근 씨와의 만남과 그리고 이별을 기념하기 위해 또 맥주를 장 봐왔다. 오늘은 이걸 다 마시고 꿀잠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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