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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Aug 12. 2021

붉은달_Budapest, Hungary

우리는 왜오래된것들을 좋아하는 가

    류블랴나의 한적함에 반해, 더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온 마리보르였다. 이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 길목에 있기도 했고, 수도가 아닌 국경지대의 소도시라면 더 한적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많았나 보다. 류블랴나엔 오래된 건물들도 많이 남아 있어서 올드 쿼터를 걷다 보면 마치 영화 속에,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는데, 여긴 올드 쿼터의 규모가 애매하다. 오래된 건물들 사이사이 골목들을 누빌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곳을 올드 쿼터라 하는 것일 텐데, 어디서 바라봐도 4차선 차도가 보이니, 이런 걸 올드 쿼터라 할 순 없겠다. 눈이 점점 더 높아진 탓이겠지만, 조금 후회스러운 마음이 든다. 부다페스트로 가기 전 잠깐 둘러보는 정도로 머물렀어도 무방했을 것만 같다.


마리보르의 풍경


    왜 나는 그 시대에 살아 본 적도 없으면서, 그 시대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 시대가 고향인 것 마냥 올드 쿼터에서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걸까? 비단 나만 이런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람도 아니면서, 시간이 멈춘듯한 옛 모습을 가진 곳들을 찾아다닌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올드 쿼터들은 관광지가 되고, 최대한 옛과 같아 보이기 위해 고풍스러운 주황 빛깔 조명으로 길을 밝히는 걸 테지.

    올드 쿼터들은 살아남은 곳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이곳은 아름다운 곳이다.'라는 말로 검증받으며 살아남은 곳이기에 우리 또한 그곳을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닐까? 아름다움뿐 아니라, 올드 쿼터가 주는 편안함도 어쩌면 수많은 시간 동안의 검증을 통해 살아남은 곳이기에 편함을 느끼는 게 아닐까. 어떻게 보면 제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인간이라지만, 궁긍적으로 추구하는 아름다움, 편안함등이 똑같이 한 곳으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부다페스트의 야경


    부다페스트가 꼭 그랬다. 사람들 말 그대로, 정말 유럽의 3대 야경으로 꼽힐만한 아주 아름다운 야경을 뽐내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올드 쿼터와 왕궁, 그리고 고풍스러운 주황 빛깔 조명이 부다페스트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부다페스트는 과거에 다뉴브 강을 기준으로 나뉘었던 부더와 페슈트가 현재 합쳐진 것이라고 하는데, 이를 떠올리며 하루는 페슈트에서 부더로, 또 하루는 부더에서 페슈트로 움직이며 노을도 보고 야경도 보았다.

    시타델에 올라 부다페스트의 노을과 야경을 구경하던 때였다. 해는 이미 다 지고, 충분히 야경이라고 할 만큼 깜깜한 밤하늘을 오렌지색 가로등들이 밝히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국회의사당 뒤편으로 붉은 보름달이 떴다. 아마 아직 완전히 지지 않은 태양의 노을빛이 반사되나 보다. 이런 과학적 이유는 잠시 접어두고, 달이 주는 오묘한 느낌을 즐겼다.



    보름인가 보다. 달이 무척 동그랗다. 보름달을 보면 괜히 기분이 묘해진다. 실제로는 양력 생일을 쓰긴 하지만, 음력으로 치면 보름달이 뜨는 15일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괜한 의미부여라는 걸 잘 알지만 하늘에 보름달이 뜨면 난 괜스레 이게 반갑다. 장난 삼아 '난 보름달이 뜨는 날 태어났어, 보름달을 보면 내 생각을 해줘'라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곤 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문득 나를 떠올렸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부린다.

    내가 보는 보름달을 다들 똑같이 보고 있겠지. 아마 대부분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한국에 있으니 아침시간일 테고, 그러니 보름달은 없겠지만, 어찌 됐건 나와 같은 하늘을 보고 있겠지. 마치 엄청 커다란 영화관에서 같은 스크린을 보고 있음에도 좌석이 너무 멀어 닿지 않을 뿐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들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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