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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Aug 14. 2021

운수 좋은 날_Vienna, Austria

행운과 불운의 균형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아마 고등학교 때 배웠던 현대문학 작품 중에, 유일하게 대사까지 기억하고 있는 작품일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게, 이 작품에서처럼 뭔가 운수가 좋은 날, 불행한 사건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게 되는 날들이 내게 더러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정말 시대를 관통하는 작품이 아닐까? 참 신기하다. 행복과 불행이 꼭 균형을 맞춰야 세상이 굴러가는 것처럼, 둘은 항상 같이 다닌다.


너무 귀여운 헝가리 소녀 그런데 이제 숟가락을 조금 곁들인


    오늘이 딱 그랬다. 이상하게 오늘 아침 따라 기분이 엄청 좋았다. 잠자리가 편했던 것도 아닌데, 숙면을 취한 듯 개운했다. 다른 호스텔보다 체크아웃 시간이 아침 10시로 일러서 일찍 숙소를 나섰으나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늘은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예매해둔 버스는 오후 1시였기 때문에 시간은 꽤 많이 남아있었다. 기분도 좋고, 괜히 여유를 부리고 싶은 마음에 숙소에 짐을 맡겨두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관광지 상점들은 이제야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했고, 거리엔 바쁘게 움직여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속에, 나 홀로 여유롭게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다는 게 참 맘에 들었다. 나 혼자서만 여유로운 느낌이랄까? 비록 추운 날씨였지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탓에 쏟아지는 햇살이 가만히 있어도 아름다운 거리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에스프레소와 치즈케이크도 잊지 못할 만큼 맛있었고, 게다가 숙소에서는 죽어라고 터지지 않던 와이파이가 아주 잘 터졌다. 모처럼 가족, 친구들과 영상 통화를 하며 나의 안부를 전했다. 아니 나의 이 행복과 여유로움을 자랑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따라 난 너무 기분이 좋다고, 커피도 맛있고, 거리도 너무 예쁘고,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며 말이다.


    잠깐 동안의 여유를 즐기고 나서 헝가리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하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바로 '굴라쉬'를 먹어 보는 것이다. 나는 보통 먹을거리에 크게 관심을 두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헝가리 스타일의 육개장이라니, 이건 포기할 수 없었다. 돈도 아낄 겸, 현지 문화도 느낄 겸 한식을 최대한 지양하고 있는데, '굴라쉬'는 현지 음식이기도 하며, 한식의 느낌도 난다니 이건 일석이조가 아닌가. 더군다나 헝가리가 원조인 음식이라는데, 이건 헝가리에 머물 때 꼭 먹어 봐야 하는 것이었다. 마침 류블랴나에서 만난 형근 씨가, 굴라쉬 맛집을 추천해주기도 했었다.

    아쉽게도 그가 추천해준 곳은 오늘 쉬는 날이었지만, 포기하기엔 일렀다. 헝가리 국민 음식인 굴라쉬는 분명 어딜 가도 팔 것이다. 정처 없이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며 메뉴판에 굴라쉬가 적혀있는 곳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 점심시간이 되려면 멀었던 탓일까, 브런치 메뉴만 나와있을 뿐 굴라쉬가 적혀있는 곳들은 많지 않았는데, 바로 그때 숙소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굴라쉬를 파는 레스토랑을 발견했다. "지금 굴라쉬 돼요?"하고 물으니 웨이터는 밖에서 메뉴판을 보고 있는 내게 들어오라는 듯 손짓하며 자리로 안내했다. 그런데 아뿔싸 들어와 보니 여긴 고급 스테이크 전문점이었다. 굴라쉬와 함께 다른 메뉴도 곁들일 예정이었는데, 가격이 너무 비쌌다. 그렇다고 다른 곳을 다시 찾을 수는 없고, 하는 수 없이 조금 민망하지만 굴라쉬만을 주문했다. 백반집에 가서 공깃밥 없이 국만 달라고 한 느낌이랄까...? 그래, 굴라쉬에 들어가는 고기는 그래도 고급지겠지 하며 스스로를 위로한 채 굴라쉬를 기다렸다.

    그런데.... 내가 바깥에서 너무 오랜 시간 서성인 탓일까...? 버스시간이 점점 코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굴라쉬가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음식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아직도 내 굴라쉬는 나오질 않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한 시간인데, 그리고 숙소에서 짐도 찾아야 하는데, 큰일이었다. 굴라쉬를 최대한 빨리 먹지 않으면 버스를 놓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내 앞에 굴라쉬가 놓이는 순간, 그렇게나 기대했던 굴라쉬였음에도 불구하고,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흡입하기 바빴다. 웨이터도 깜짝 놀랄 만큼 굴라쉬를 눈 깜짝할 새에 해치우고 황급히 레스토랑을 나와 숙소로 향했다.


문제의 굴라쉬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나 숙소와 멀리 떨어진 레스토랑에 오게 된 걸까? 한참을 걸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에서 후다닥 짐을 찾고 버스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굴라쉬를 기다리는 동안 미리 알아두었던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왜 꼭 이렇게 급할 땐 지하철을 반대로 타게 되는 걸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일부 구간이 공사 중이라며 트램으로 갈아타게 만드는 걸까? 다시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그리고 갈아탄 트램 안에서 한 천 번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것 같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버스 시간을 5분 남기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불행이 찾아왔다. 버스정류장에 버스가 정말 많았다. 정체모를 두 버스정류장이 (지금 와 생각해보면 국내선 / 국제선 버스 정류장이었을 것 같다) 함께 있었다. 이곳에서 5분 안에 내가 타야 하는 버스를 찾아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내가 타야 하는 버스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바쁜 와중에 찍은 헝가리의 지하철(왼쪽,가운데)  / 부다페스트의 트램(오른쪽) 


    "버스 티켓을 사 왔는데, 왜 타질 아니하니"


    결국 버스를 놓쳤다. 그냥 처음부터 1시 50분 차를 탈걸. 괜히 한 푼 아껴보겠다고 1시 버스를 예약했다가 이 사달이 났다. 그냥 여러 번 타본 버스회사의 버스를 탈 걸, 괜히 몇 푼 아껴보겠다고 더 저렴한 버스를 예매했더니 이 사달이 났다. 아까운 내 11유로. 이 돈이면 하룻밤을 더 잘 수 있는 돈인데. 그렇다고 또다시 저렴한 버스의 시간까지 기다릴 순 없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선 친구를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가 내 버스 시간에 맞춰서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너무 늦은 버스를 탈 수는 없었다.

    결국 1시 50분 차를 타고 비엔나로 향했다. 어쨌거나 나는 50분을 늦게 된 것이니까, 친구한테 이 사실을 알려줘야 했는데, 이제는 와이파이가 문제였다. 나는 데이터를 사용하지 않으며 여행을 이어가고 있으니, 와이파이 없이는 친구와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분명 와이파이가 되는 버스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도통 와이파이가 잡힐 생각을 안 했다. 여러 방법으로 시도해 보았으나 모든 방법을 실패하고, 결국 오랜만에 한국 유심을 휴대폰에 꽂아야 했다. 로밍 데이터를 사용해 친구에게 바뀐 스케줄을 알려주고,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정말 여러모로, 다이내믹하다.


와이파이를 대신할 핫스팟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 이렇게 적어서 버스에 탄 사람에게 무작위로 에어드롭을 전송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기분이 좋았던 아침과 균형이 맞는지, 다행히도 불행은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것에서 끝났다. 나는 무사히 비엔나에 도착했고, 무사히 캄보디아에서 인연을 쌓았던 친구 폴을 만났다. 나는 아마 그를 만나자마자 다이내믹한 나의 하루에 대해서 봇물 터지듯 쏟아내었던 것 같다.

    그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아늑한 그의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비엔나의 밤거리를 조금 산책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집 근처 피자집에서 맥주를 나눠 마시며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앞으로 당분간은 폴네 집에 머물며 비엔나를 둘러볼 예정이다.


소세지를 사고있는 폴, 그리고 피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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