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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호 Aug 20. 2021

그때 그 친구네 나라 4_Vienna, Austria

살아보기

ㅤ비엔나에서의 마지막 날, 마지막 밤. 어제보다 훨씬 더 여유를 부리고, 기분 좋은 취기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오늘을 여행 중 휴일로 삼았다. 내겐 매일매일이 휴일이긴 하지만, 정말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며, 혹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질타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날이다. 피곤이 쌓여있진 않았겠지만 잠도 실컷 잤고, 느지막이 일어나서 최대한 폴네 집이 내 집인 것처럼, 비엔나가 내가 사는 도시인 것처럼 행동했다. 비엔나에서 열심히 살던 누군가가 오랜만에 휴일을 맞이 한 것처럼.


    커피를 내려 마셨다. 폴의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무려 100년은 더 된 커피 그라인더로 커피 원두를 직접 갈았다. 또 폴과 폴의 사촌 형은 외출한 상태니까 아주 느릿느릿 따뜻한 물로 샤워도 했다. 그리고 묵은 빨래들을 돌리고 시리얼과 바게트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했다. 그리고는 남은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데, 잠이 쏟아져서 다시 잠을 청했다.

    참 별것도 아닌 순간들이다. 그런데 별것도 아닌 일을 이렇게 기록까지 남기려고 하는 거 보면, 그 별것도 아닌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행복했나 보다. 그래, 이런 게 진짜 휴식이다.


폴네 집에 있던 이유 모를, 원인 모를 낙서

    점심이 훌쩍 지나 밖으로 나왔다. 오늘만큼은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아니라, 정말 마음이 시켜서 나왔다. 나는 쉬는 날 집에서 쉬기보단, 밖으로 나와 전에 가보고 싶었던 카페를 간다던가, 전시회를 간다던가 하면 오히려 더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면 더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벨베데레 궁전에 다녀왔다.

    이 벨베데레를 찾았던 이유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키스(연인)>를 보기 위해서였다. 비엔나는 어딜 가든 클림트를 볼 수 있었다. 특히나 이 <키스>라는 작품은 어디에고 있었다. 컵에도, 마그넷에도, 카드에도, 우산에도, 티셔츠에도, 관광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들에는 클림트가 그리고 <키스>가 있었다. 이렇듯 비엔나에 왔으면 무조건 봐야 하는 작품이라길래 관심이 생겼고, 그렇게 그 작품을 보러 벨베데레 궁전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클림트의 작품보다 다른 작품들을 많이 만나고 온 기분이다. 예컨대 지금 흔히 알고 있는 에곤 쉴레의 스타일이 아닌, 그전의 그의 습작들이라던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더 눈에 들어왔다. 구경하는 일이 너무 즐거워서 폐장시간 때까지 머물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역시나 미술관을 선택한 건 훌륭한 선택이었다. 괜히 에너지가 더 생기는 기분이었다. 오늘의 일정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면 딱 좋겠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쉬기도 푹 쉬었고, 보고 싶었던 것도 봤으니까 오늘 하루는 정말 알차게, 좋은 기분으로 가득 채웠다.


벨베데레 궁전
에곤 쉴레 <Four Trees> /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연인)> / 모네 <지베라니 정원의 길>


    그런데 문득, 오늘이 비엔나의 마지막 밤이라는 게 실감 났다. 짧은 시간 동안 머물렀지만 다른 도시들보다 그나마 길게 머무른 탓에 정이 들었는지, 아니면 폴이 주는 아늑함 때문인지, 꽉 찬 하루를 보냈음에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내일 잘츠부르크로 떠날 차편을 예약하고, (처음으로 카풀을 이용해 본다.) 주섬주섬 옷을 겉옷을 챙겨 집 앞에 있는 작은 바에 놀러 갔다. 마침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어서 공연도 구경하고, 맛있는 맥주를 연거푸 들이키며 분위기를 즐기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마지막 날 마시는 맥주는 국룰


    행복한 하루 덕에 취기가 바짝 올라 집으로 돌아왔는데, 폴과 그의 사촌 형이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래 나만 쉬는 날이었지.'


    그들과 한 잔 더 하며 비엔나의 시간들을 마무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불가능했다. 보통은 내가 들어오고 나서야 그들이 들어오길래, 오늘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은 셋 중에 내가 제일 늦게 들어왔다. 이미 다들 곯아떨어져 있으니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의 침대, 그러니까 거실의 소파에 앉아 홀로 맥주를 마시며, 비엔나에게 마음속으로 이별을 고했다. 아니 근데, 이러다가 내일 아침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그들이 나가기 전에 내가 일어나야 할 텐데. 내가 미친 듯이 자고 있더라도, 그들이 나를 꼭 깨워줬으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그들에게 고마웠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은데.


안녕 폴


    주야장천 이동만 하느라 못 느꼈는데, 문득 진짜 '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살아 보는'여행. 좋아하는 사람 치고, 뒤를 돌아보면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내진 않은 것 같다. 이제 앞으로 이런 시간들을 많이 만들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이제 여행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끝내야 할지 정해 버렸다. 그 일정에 맞춰, 내가 꼭 해야 할 일들, 하고 싶어 한 일들을 해야 하니까 '살아보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없을 것 같아서 아쉽다. 그래서 문득 이 비엔나에서의 시간이 참 소중하다.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살아보기'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 비엔나의 시간을 소중하게 고이고이 잘 접어서 오래도록 간직할 테다.


    안녕 비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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