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다
어쩌다 보니 벌써 산티아고 순례길이 눈앞이다.
이렇게 급하게 시작할 생각은 없었는데, 숙박비가 비싸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이동을 이어가다 보니 벌써 바욘에 도착했다. 이곳 바욘에서 약간의 준비를 한 뒤에, '생장 피에르 데 포르'로 이동하여, 스페인 순례길을 시작할 예정이다.
프랑스 하면 와인이고, 또 와인 하면 보르도 산 와인이 유명하니까 사실 바욘에 도착하기 전 보르도에 잠시 들렀었다. 와인의 ㅇ자도 모르는 나도 보르도 산 와인이 유명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에, 와인으로 유명한 도시 보르도에서 와인 한 잔을 마셔보기로 한 것이다. 그 때문일까, 나는 보르도가 포도밭이 가득한 아주 한적한 마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르도에서 와인을 정말 많이 팔긴 팔았나 보다. 거의 파리 수준으로 엄청 커다란 도시였다. 그런 이유로 와인은 고사하고, 보르도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큰 도시의 숙박비는 도시의 크기만큼이나 비쌌으니까.
그렇다고 바욘 역시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바욘에 이틀 이상을 머물며 필요한 물건들도 마저 구비하고 짐도 정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욘의 숙박비를 보고 난 이후로 그런 마음이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한시라도 빨리 바욘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일을 과감히 생략했다. 두 발만 있으면 걷기에는 문제가 없을 테니까. 사실 그런 두 발을 위한 새로운 신발은 지난번 아를에서 새로 사 두기도 하였으니, 생략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짐을 정리하는 일은 좀 필요했다. 짐을 다 들고 순례길을 걸을 수는 없으니까, 불필요한 것들은 미리 보내 놓을 심산으로 가방을 나눴다. 필요한 것들은 등산용 배낭에, 불필요한 것들은 일반 백팩에 넣고, 백팩을 도착하게 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미리 보내 둘 생각이다. 평소에 자주 입는 옷들과 물건들은 분명 필요할 테니, 챙겨가는 쪽으로 옮겼는데, 이상하게 가방이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뭐가 빠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자꾸 확인을 해봤을 정도로 가방이 가벼웠다. 그만큼 불필요한 짐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여태 무겁게 들고 다니며 여행을 했는가 보다. 아, 덜어내기 위한 여행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음에도, 나는 왜 여전히 욕심이 많을까.
현재의 나는 겁이 나면서 자신만만하다. 아주 아이러니한 기분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아무런 정보 없이 온 바람에 겁이 나지만, 여태는 뭐 준비가 있었나 싶은 생각으로 오히려 자신만만하다.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올리며 걱정하는 것들, 예를 들어 걷다가 물집이 잡히면 어떡하지, 걷다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게 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나도 똑같이 들지만, 여태 실제로 걱정거리들이 걱정한 만큼 있었나 하면서 자신만만한 것이다. 분명 여태 내가 해왔던 여행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 이 순례길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도 나는 세계여행 9개월 차 여행자다.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는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이상하게 가벼워진 짐도 그렇고, 겁이 나면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아이러니한 기분도 그렇고, 느낌이 참 이상하다. 비록 내일 당장부터 걷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벌써부터 기분이 아주 오묘하다.
나는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 일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걸어보려 했던 길인데, 어쩌다 이제야 왔을까.
둘이 함께 걷자고 약속했던 길에, 나는 어쩌다 혼자 오게 되었을까.
어쩌다 이 여행에 자꾸만 살이 붙어서 9개월 만인 이제야 시작하게 되었을까.
사실 '어쩌다'에 대한 물음에 답을 못 할 건 없다. 분명 원인이 있으니 그에 따른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렇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어쩌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한다. 나는 아직 그 원인을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내 맘이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이곳에 도착했다. 나의 마음속 작은 소리가 지금 이 결과를 만들어낸 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속 작은 소리가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잘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움직였을 뿐, 내 맘이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문득 처진 달팽이의 <말하는 대로>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노래 가사 중에 '그러나 정말 들어야 하는 건 내 마음속 작은 이야기 지금 바로 내 마음속에서 말하는 대로'라는 부분이 있는데, 내 마음속의 작은 이야기가 정말 작게 들리는 기분이다. 뭔가 들리긴 들리는 것 같은데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는 것만 같다.
글쎄, 산티아고 순례길이 끝나고 나면, 내 맘의 소리가 조금 더 잘 들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