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와 일하는 대기업 부장의 혼술 3

"이러다가 번아웃이 올 것 같아요."

by 박성훈

“띠링!” 휴대전화 알림음에 잠을 깼다. 알림 메시지를 보니, 황과장이 마케팅 기획 보고서를 메일로 보낸 모양이다. 새벽 2시다.

모레가 상무님 보고라, 늦어도 내일까지는 상무님께 미리 보고서를 보내야 한다. 지금 보고서를 읽어보고 피드백을 줄까 하다가 내일 주기로 한다. 황과장의 보고서는 고칠 게 별로 없다. 내일 아침에 열어봐도 금방 피드백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틀 뒤 상무님 보고가 잘 끝났다. 다만 상무님의 마지막 말씀이 마음에 걸렸다. “다른 사람은 생각이 없나? 황과장만 답을 하고 있네.” 상무님이 계속 다른 팀원들에게 질문을 했지만, 팀원들이 제대로 답을 못하고 황과장이 대신 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보고가 끝난 뒤 상무님이 주부장을 따로 불렀다. “이번 기획 보고서 말이야, 잘 썼어. 잘 썼는데, 황과장이 혼자 다 한 것 같아. 다른 팀원들은 뭘 했지?”

주부장은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대충 얼버무렸다. 며칠 전 탕비실에서 황과장과 일하는 팀원들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게 생각났다.

“대리님, 이번 기획안요, 이대로 황과장님께 보내도 괜찮을까요? 아직 자료가 많이 부족해 보여서요.”,

“야, 괜찮아~, 대충해서 보내도 과장님이 다 알아서 수정 하잖아.”,

“그건 그래요, 어차피 자기 스타일로 다시 다 쓰시잖아요.”

퇴근 시간이 다 되어 황과장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황과장, 오늘 고생했는데, 소주 한 잔 사주까(사줄까?)’.

황과장과 서둘러 경찰청 앞의 횟집에 갔다. 이 집은 여섯 시면 이미 자리가 꽉 찬다. 예약을 안 하면 일곱 시 반이 넘어야 1차 손님들이 빠지고 자리가 난다. 이 집이 인기 있는 이유는 5만 원 미만에 2인 ‘회 한 상’을 파는데, 일본식 계란찜을 한국식 뚝배기에 푸짐하게 담아 주고, 전도 나오고, 광어와 우럭회가 나오고, 매운탕도 준다. 임원 못 단 우리 부장들 주머니 사정에 딱 좋은 곳이다.

“부장님, 제가 소맥 한 잔 말아 올리겠습니다.” 황과장은 맥주잔에 소주를 낮게 깔고 맥주로 술잔의 반을 채운다. 맥주잔에 젓가락 하나를 꽂고 다른 젓가락으로 톡톡 쳐서 거품을 만든다. 딱 이 정도 양은 꺾어 마실 수 없는 양이다. 우리 아버지가 첫 잔은 천천히 마시라고 하셨지만, 이건 원샷을 부르는 엄청난 유혹이다. 한 잔 쭉 마신다. 거품이 부드럽다.

황과장이 만들어 준 소맥을 몇 잔 더 마시고 있으니, 모듬회가 나왔다.

“부장님, 제가 ‘비법 양념’을 제조하겠습니다, 이모님! 여기 공기밥 하나랑 참기름 좀 주세요.”

황과장이 기본으로 나온 간 마늘 섞인 막장 그릇에 간장, 초장, 고추냉이를 섞고 참기름을 넉넉하게 적셔서 내 앞에 놓아준다. “부장님, 여기 밥 반 숟가락 하구요, 광어 뱃살 한 점 하구요, 씻은 김치 올리고, 비법 양념 올려서 딱 드셔보십시오.”

쫄깃개운한 풍미다. 어느새 황과장이 소맥도 말아 놓았다. 한 잔 쭉 들이키고 나니, 그 ‘비법 양념’ 얹은 회를 또 한 번 더 먹고 싶어진다. 역시 황과장이 또 한 숟가락 만들고 있다.

황과장과 소맥 여러 잔을 마셨다. 첫 잔을 빨리 마셔서 그런지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온다. 황과장도 얼굴이 벌겋다.

“니 요새 안힘드나(힘들지는 않니?).”

“부장님, 저 요즘 힘들어 죽겠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이러다가 번아웃이 올 것 같아요.

“야, 내가 명색이 인사조직 박산데(박사인데), 지 입으로 번아웃 온다는 놈치고 진짜 번아웃인 놈 못봤데이.”

황과장과 같은 과장급은 사실 번아웃(Burn-out)이 아니라 보어아웃(Bore-out)이 오는 게 정상이다. 보어아웃은 반복된 업무가 지루해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대리, 과장급에 제일 많이 찾아온다. 하는 일도 익숙해졌고, 어떻게 하면 인정받을지도 대충 알만할 때 보어아웃이 온다.

그런데 황과장 직급에 번아웃이 온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회사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보통은 사원과 대리가 만든 보고서 초안을 검토하고 다듬는 것이 과장의 역할이다. 물론 직급 정체가 심해져서 팀 내에 과장이 흔해졌다고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장급의 역할은 팀원들의 역할과는 구분되는 게 정상이다.

팀장의 역할이 프로젝트 관리(Managing)라면, 팀원 역할은 프로젝트 실행(Executing)이다. 같은 대비를 좀 더 들어보면, 팀장의 역할이 프로젝트 기획(Planning)이라면, 팀원 역할은 수행(Performing)이다. 팀장이 조율(Coordinating)하면, 팀원은 참여(Participating)한다. 팀장이 리딩(Leading)하면, 팀원은 팔로잉(Following)한다. 팀장이 전략을 수립(Strategizing)하면, 팀원은 작업을 수행(Tasking)한다.

그런데 모든 업무를 직접 처리하려는 팀장은 관리와 실행을 동시에 하게 된다. 본인이 전략을 수립하고, 작업 수행까지 동시에 한다. 본인이 리딩하면서 본인이 팔로잉까지 하는 꼴이다. 이 문제가 지속되면 팀원들이 더는 업무에 정성을 쏟지 않게 된다. 어차피 팀장이 보고서를 처음부터 다시 쓸 거면, 과연 보고서 초안에 공을 들이는 팀원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물론 ‘아직 과장급은 빨간펜을 들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과장급이 보고서의 가장 많은 부분, 핵심 부분을 책임져야 할 직급인 것은 맞다. 그런데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과장 때 빨간펜 드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부장 때는 더 배우기 어렵다. 부장의 눈높이에서 대리, 과장이 써 온 보고서를 보면 뜯어고쳐야 할 부분이 더 많이 보인다. 부장의 보고서 만드는 실력이 는 게 아니다.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대리, 과장까지는 보고서 자체의 논리를 중요하게 여긴다. 반면 부장쯤 되면 임원한테 어떻게 보고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게 된다. 보고서용 보고서와 임원의 입맛에 맞는 발표용 보고서의 구성이 완전히 달라야 하므로, 더 많이 뜯어고칠 게 보인다. 이걸 부장이 되어서도 직접 수정하다 운 좋게 임원을 달면, 이제 이런 소리가 나온다. ‘내가 왜 이런 것까지 다 봐주고 있어야 하지? ‘부장, 과장은 뭐 하는 거야?’ 부장, 과장이 뭘 안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그들이 쓰고 수정해야 할 보고서를 당신이 붙잡고 직접 수정하니 그들이 할 일을 못 하는 거다. 그들도 다 생각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당신이 수정해서 완료한 보고서를 다시 손댈 수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이 문제는 초급 관리자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기초 적인 문제다. 이런 문제는 두 단계로 해결할 수 있다. 첫째는 상급 관리자가 직급별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해주면 된다. 상급 관리자는 초급 관리자가 (본인에게 혼날까 봐) 불안해하지 않고 관리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계속 독려해줘야 한다. 두 번째는 초급 관리자 스스로 ‘직접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정을 지시하고 확인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기초적인 문제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의사결정 권한에 대한 부분이다. 보통 기획 보고서에 담기는 핵심 내용은 새로운 프로젝트의 목표, 기한, 필요한 자원이다. 이 핵심 내용을 결정하는데 팀원들이 얼마만큼 자율적으로 참여했는지가 팀원들의 동기와 몰입 수준에 영향을 준다.

이때 필요한 것이 권한 위임(Delegation or Empowerment)이다. 권한 위임의 개념은 목표 설정 이론(Goal Setting Theory)을 만든 에드윈 락(Edwin Locke) 선생님이 정립했다. 에드윈 선생님이 이 개념을 만들었던 1970년대에는 미국 기업의 경영방식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 미국 기업들은 상명하복식 위계 구조가 강했고 구성원의 동기 저하와 생산성 하락에 대한 개선 요구가 커지고 있었다. 반면 토요타 경영방식으로 잘 알려진, 팀워크 중심의 일본식 경영방식이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윈 선생님은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의사결정의 권한을 위임하면 부하 직원의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이 높아지고 동기부여도 잘 된다고 주장했다.

단순히 사원, 대리가 보고서 초안을 잡고 과장이 수정하는 얘기가 아니다. 보고서 내용에 관한 얘기다. 기획 보고서에 담길 프로젝트의 목표, 기한, 필요 자원에 대한 의사결정 권한을 위임하라는 얘기다. 그래야 황과장 팀의 대리, 사원이 해당 프로젝트에 애착을 갖고 동기 부여되어 일할 수 있다. 황과장의 번아웃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매운탕이 나왔다. 이 집 매운탕의 특징은 수제비 반죽을 같이 준다는 점이다. 비닐장갑을 끼고 손님이 직접 반죽을 떼 탕에 넣고 수제비를 만들어 먹는다.

“부장님, 제가 수제비 쫄깃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쫌(제발)! 혼자 다 하지 말라고~, 내가 하께. 니는 건들지마.”

정말 대~충 반죽을 떼어 넣은 주부장표 수제비를 생선 머리랑 같이 떠서 황과장 앞에 놓아준다. 내가 만든 걸 직접 떠주는 기분이 꽤 좋다.

“부장님, 수제비 뭉치가 덜 익었습니다.”

“쫌! 고마 묵으라(그냥 먹어라)!” 역시 의사결정 권한을 위임할 때에는 책임도 같이 위임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단계 더 들어가자면, 에드윈 선생님에게 권한(Power)은 ‘리더가 넘겨줄 수 있는 자원’이다. 넘겨주는 행위는 리더의 판단하에 이뤄진다. 조직의 목표 달성을 위해, 혹은 직원의 동기부여를 위해 리더가 권한을 위임할지 결정하고 실행한다. 에드윈 선생님이 인사조직 분야에서는 최고의 대가이지만, 그 분의 이론이 리더의 관점에서 쓰였다는 아쉬움이 있다.

반면, 에드윈 선생님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메리 파커 폴렛(Mary Parker Follet) 선생님은 권한은 ‘함께 만드는 것(Power-with)’이라고 말씀하셨다. 메리 선생님은 1868년에 태어났다. 학창 시절 메리 선생님의 학업 능력은 월등했지만, 하버드 대학교에는 입학할 수 없었다. 당시 하버드는 여성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리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고 여성 차별의 벽을 우회해서 동시대 남성 경영학자들과 대등한 수준의 연구를 해냈다. 선생님은 대학에서 연구를 한 게 아니라 사회복지 현장에서 연구했다. 오늘날 메리 선생님은 ‘현대 경영학과 조직행동 연구의 어머니’로 불린다. 메리 선생님의 사상은 임파워링 리더십, 참여적 조직문화의 뿌리가 된다.

메리 선생님이 권한을 ‘함께 만들자’라고 한 이유는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이를 팀 입장에 적용해보면, 팀의 기획안을 직접 실행까지 옮기기 위함이다. 대기업에서 일하다 보면 A팀이 만든 기획안을 B팀이 실행하게 넘겨줘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예산이 한정되어 있을 때는 좋은 기획안도 순서에 밀려 어그러지는 경우도 많다. ‘이번에는 B팀 것을 밀어주자, 다음엔 꼭 A팀 것을 밀어줄게.’ 임원이 약속하지만 그 순서가 되었을 때는 그 임원도 자리에 없고 팀장도 그 자리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팀장 혼자 지지고 볶고 해서 만든 기획안이 그렇게 다른 팀으로 넘어가거나 혹은 어그러졌을 때, 그 기획과정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팀원들은 별로 아쉬울 게 없다. 하지만 ‘함께 만든 기획안’은 다르다. 다른 팀엔 절대 넘길 수 없고, 어그러뜨릴 수도 없다는 팀원 전체의 포스(Force)는 당연히 임원에게도 전해진다. 그 힘이 느껴지면 임원도 함부로 그 기획안을 다른 팀에게 넘기거나 중단시키기 어렵다. 반면 그런 힘이 느껴지지 않으면 황과장의 임원 보고 때처럼 팀원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황과장만 대답하네…’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 기획안은 언제든 다른 팀에게 실행 권한이 넘어갈 수 있다.

결국, 권한을 함께 만드는 것은 우리가 기획한 프로젝트를 실행 단계까지 지켜나가는 힘이 된다.

서비스로 주는 튀밥 강정을 먹으며, 횟집을 나선다.

“부장님, 오늘 말씀 감사했습니다. 내일부터는 후배 입장도 생각해서 나눠서 해보겠습니다.”

“그래, 니가 다 할라고 하지마, 그러면 너네 팀의 권한도 없어지는 거야.”

“옛 썰. 열심히 하겠습니다. 부장님, 여기 근처에 골뱅이가 맛있는 집이 있는데요, 거기서 2차 하실래요? 제가 소면을 또 기가 막히게 비빕니다. 소면에 들기름을 부어서요…”

“야! 쫌! 혼자 다 하지 말라고~. 소면, 내가 비빈데이, 국수 한 가닥이라도 건들기만 해봐라.”

황과장의 증상은 쉽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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