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과 쓰나미에 적응하기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같은 지역임에도 상반된 결과를 불러온 대응 사례가 있다. 일본 이와테현 아네요시(姉吉) 마을 중턱에는 오래된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 비석에는 ‘이곳보다 아래에 집을 짓지 말라’는 경고가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1896년의 쓰나미, 1933년의 쓰나미를 겪은 마을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쓰나미의 최대 높이를 후손들을 위해 경고한 것이다.
아네요시 신사 아랫마을은 주민 수가 4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조상들이 남긴 경고를 따랐다. 비석 위쪽의 고지대에만 집을 지은 덕분에 동일본 대지진 당시 쓰나미가 마을 아래까지 도달했지만, 비석 50~100m 아래에서 멈추었다. 주민과 주택 모두 피해가 없었다. 아네요시 마을 촌장 키무라 타미시게 씨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조상들은 쓰나미의 공포를 알고, 우리 후손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 비석을 만들었다”고 말했다.(1)
이와테현을 포함한 일본 동북부 해안에는 이 같은 비석 수백 개가 세워져 있다. 그중에는 600년이 넘은 것도 있고, 높이가 3m에 이르는 것도 있다. 일부는 하도 오래되어 글씨가 지워진 것도 있다. 대부분 비석은 1896년 2만2천 명이 숨진 쓰나미의 기억을 담아, 후손에게 경고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2) 그런데, 모든 마을이 이 경고에 따른 것은 아니다.
아네요시 마을과 똑같이 이와테 현에 속한 다로 마을과 오츠치 마을은 조상들의 경고를 따르지 않고 저지대에 집을 지었다. 그 결과 동일본 대지진 때 이 두 마을은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방조제가 있었지만 마을을 지켜주지 못했다. 결국, 기후 재난의 기억을 잊지 않고 전승받고 관리한 마을 사람들은 생존할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마을은 큰 피해를 입었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경고 비석이 없었음에도 쓰나미의 피해를 벗어난 마을이 있다. 바로 이와테 현의 후다이 마을이다. 후다이 마을은 방조제와 수문이라는 물리적 인프라가 주민 3천명의 생명을 지켜냈다. 이는 단순한 운이 아니라 촌장의 집념과 역사적 기억에 기반한 선제 대응 덕분이었다.
1896년 15m가 넘는 초대형 쓰나미가 후다이 마을을 덮쳤고, 1933년에도 대형 쓰나미가 몰려왔다. 두 차례의 쓰나미로 44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숨졌다. 후다이 마을의 촌장이었던 와무라 유키에 씨는 1933년 쓰나미의 생존자였다. 본인 스스로 쓰나미의 위력을 겪어봤기 때문에, 와무라 촌장은 마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방조제와 수문 설치를 고집했다. 그는 1960년대부터 설계를 시작하여 20년간 끈질기게 정부와 주민을 설득했다.
마침내 1984년에 36억 엔(당시 가치로 약 250억 원)을 투입해 15.5m의 방조제와 205m 너비의 수문을 지었다. 마을 사람들은 ‘쓸 데 없는 데 돈을 낭비한다’며 와무라 촌장을 비판했다. 마침 옆 마을인 미야코 시에도 10m 높이의 방조제가 건설되었는데, 이것 또한 ‘만리장성’이라며 비판을 받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높은 15.5m의 방조제라니 얼마나 많은 비판과 비아냥을 들었겠는가. 결국 와무라 촌장은 평생 비판만 받다가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여 14m 높이의 초대형 쓰나미가 마을을 덮쳤다. 하지만 15.5m의 방조제가 쓰나미를 막아주었다. 당시 방조제 밖에 있던 한 명이 숨졌고, 방조제 바깥 시설은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방조제 안쪽의 시설 피해는 전혀 없었고, 모든 마을 사람들도 무사했다. 반면 옆 마을인 미야코 마을이 쌓은, 만리장성이라 비판 받았던 10m의 방조제는 14m에 달하는 쓰나미를 막아낼 수 없었다. 결국 미야코 마을에서는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후카와타 히로시 촌장은 “쓰나미를 막으려는 와무라 촌장의 열정이 주민들을 구했다”고 말했다. 2016년 후다이 마을 주민들은 와무라 촌장을 기리기 위한 비석을 세웠다. 그 비석에는 와무라 촌장이 평소에 얘기하고 다녔던, “두 번이나 겪은 일을 세 번 겪을 수는 없다”는 문구가 새겨졌다.(3)
후다이 마을 사례처럼, 쓰나미가 예상될 때 일반적인 대응 방법은 방조제를 건설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예상되는 최대 쓰나미의 높이가 34m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안가를 따라 최소 34m 이상의 방조제를 짓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일본의 구로시오초(黒潮町)는 일본 남서부 지역에 있는 인구 1만명 남짓의 어촌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진앙지인 동북부 지역과는 직선거리로 1천km 이상 떨어져 있다. 그런데 구로시오초는 동일본 대지진 다음 해에 일본 정부가 발표한 ‘난카이 해곡(Nankai Trough) 대지진 시뮬레이션’에서 최대 34m 쓰나미가 예상되는 위험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평화롭던 작은 어촌은 순식간에 ‘일본에서 제일 위험한 마을’로 뒤바뀌었다.
난카이 해곡은 일본 남부 해안 전역에 맞닿아 있는 해저 지형이다. 이 해곡은 필리핀해 판이 유라시아 판 아래로 들어가는 경계에 해당되어, 지구에서 가장 위험한 지진 발생 지대 중 하나로 꼽힌다. 최근 몇 년 간 일본 기상청은 난카이 해곡 지진에 대해 ‘향후 30년 이내 발생 확률이 80% 이상’이라는 발표를 내놓고 있다. 과거에는 약 100~150년 주기로 대지진이 발생해 왔는데, 마지막 대지진이 1944년 도난카이(東南海) 지진, 1946년 난카이(南海) 지진이었기 때문에 이미 70~80년 이상이 지난 상황이다.
만약 지진이 발생하면 그 규모는 최대 리히터 규모 8~9급이고, 쓰나미 높이는 최대 34m이며, 일본 열도의 약 30%가 침수될 가능성이 있다. 사망자는 최대 29만 명, 피난민은 최대 1천2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참고로 일본 역대 지진 중 가장 강력한 지진 중 하나였던 동일본 대지진의 리히터 규모도 9였다.(4)
이 시뮬레이션에서 예측한 최대 34m 높이의 쓰나미가 구로시오초에 닥칠 가능성이 크다. 구로시오초는 무슨 방편이든 30년 이내에 올지 모르는 쓰나미를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해안가에 34m 이상 높이의 방조제를 설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구로시오초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구로시오초는 방조제 건설을 포기했다. 대신 8층 높이의 ‘피난 타워(Tsunami Emergency Tower, 津波避難タワ)’를 설치했다. 일본 최대 규모의 피난 타워다. 이 피난 타워에서 주민 주도의 대피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며 쓰나미에 대비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해도 모범적인 대응이지만, 그래도 여느 일본 해안가 도시들도 생각하고 시도해 볼만한 수준의 대응이다.
그런데 구로시오초는 한 발 더 나가 방재 산업으로 지역 경제를 변화시켰다. 방조제를 설치하는 대신 해안가의 경치를 살렸기 때문에, 아름다운 해변을 활용한 모래사장 미술관도 운영할 수 있었다. 매년 수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 방재 관광도 하고 있다. 쿠로시오초 방재 관광 웹페이지(5)에는 방재 학습 프로그램, 피난 타워 견학, 지역 방재 체험 프로그램, 숙박형 야간 피난 훈련 프로그램, 방재 통조림 창작 요리 프로그램의 다섯 가지 프로그램이 소개되어 있다.
2014년에는 방재 사업의 하나로 통조림 공장(Kuro Can)을 설립했다. 보통 비상식량인 통조림을 떠올리면, ‘맛이 없다’는 선입관이 있다. 그런데 이 통조림은 ‘매일 먹고 싶은 맛’을 추구했다. 단순한 비상식이 아니라 진수성찬의 맛을 목표로, 미슐랭 셰프와 협업해 고급 식재료와 조리법을 적용했다. 그 결과 선물용으로도 인기 있을 만큼 좋은 품질과 깔끔한 디자인의 통조림이 탄생했다. 통조림 메뉴 중 하나인 ‘가다랑어와 해물이 가득한 현미 빠에야’는 2025년에 요리상을 받기도 했다.(6)
통조림 공장은 이재민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이재민들이 겪은 고통을 통조림 제조 과정에 반영했다. 알레르기 때문에 식사를 못 한 사연, 영양 부족으로 구내염이 발생한 사연, 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고 싶었던 부모의 절절한 사연을 반영했다. 그 결과 알러지 프리, 균형적인 영양, 맛 중심의 통조림이 개발되었다. 통조림 공장은 연간 20만~25만 개의 통조림을 출하한다. 그 매출은 구로시오초가 속한 고치현 내 쇼핑몰 매출 Top 5에 올랐다. 지역 주민에 대한 고용 창출은 물론, 통조림을 관광 자원화하는데도 성공했다.
‘도망쳐 통조림’ 프로젝트도 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방재 의식을 높이기 위한 캔 디자인 혁신이다. 캔에 비상 대피를 안내하는 픽토그램을 넣고, ‘흔들리면 도망쳐’라는 메시지를 넣었다. 통조림이 단순한 비상식량이 아니라 재난 교육 도구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구로시오초의 사례는 기후 적응의 관점을 변화시킨 사례이다. 이 적응 활동이 성공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단순히 생존을 위한 기술 중심의 적응에서 벗어나 공동체와 지역 경제 중심의 대응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방재가 삶의 일부이며, 관광과 문화 산업으로 확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 결과는 인구 유지에서 나타났다. 원래 정부의 ‘난카이 해곡 대지진 시뮬레이션’이 발표되었을 때, 전문가들은 1만 명의 주민 중 최소 20%가 구로시오초를 떠날 거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구로시오초의 인구는 1만 명을 유지하고 있다.(7)
인도네시아 서부 해안의 아체(Aceh) 지역도 방조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쓰나미에 대비하고 있다. 2004년 12월, 아체 지역은 규모 9.1의 지진과 그에 따른 쓰나미로 16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극심한 피해를 보았다. 해안 마을은 거의 전멸했고, 방조제 같은 인공 구조물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런데 쓰나미의 진앙과 불과 40km 떨어진 시메울루(Simeulue) 섬은 쓰나미의 직격탄을 맞았지만, 사망자 수가 현저히 적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섬을 둘러싼 건강한 맹그로브 숲이 파도의 에너지를 흡수한 것이다. 시메울루 섬의 사례는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와 국제기구가 맹그로브 복원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체 지역에서도 맹그로브 숲 복원이 시작되었다.(8)
맹그로브는 뿌리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파도 에너지를 흡수하고 침식을 막는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한다. 해일과 쓰나미의 에너지를 최대 70%까지 흡수할 수 있고, 실제로 선박들이 맹그로브 숲 안쪽으로 대피해 피해를 피한 사례도 보고되었다.(9) 맹그로브 숲을 조성할 경우 생물 다양성이 회복되고, 탄소 흡수량이 증가하여 기후 변화 완화에도 기여한다.
인도네시아 아체 지역의 맹그로브 숲 복원 사례는 기후 적응이 단순히 기술적이고 물리적인 적응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자연을 회복하는 것 또한 훌륭한 기후 적응 방법임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참고문헌>
(1) Fackler, M. (2011, April 20). Tsunami Warnings, Written in Stone. The New York Times. https://www.nytimes.com/2011/04/21/world/asia/21stones.html
(2) 박희준 (2011.04.23.). “”이 아래는 집을 짓지 말라“ 쓰나미 경고석의 교훈”. 아시아경제.
https://cm.asiae.co.kr/article/2011042217524895724
(3) 오정은 (2011.04.05.). “44년전 ‘촌장의 지혜’가 주민 3000명 살렸다”. 머니투데이.
https://www.mt.co.kr/world/2011/04/05/2011040507403910398
(4) 박상현 (2025.01.16.). “일 난카이서 30년내 대지진 발생확률 ‘70~80%→80%정도’ 상향”.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250116090600073
(5) 구로시오 방재관광 웹페이지. https://kuroshio-kanko.net/bousai/ (접속일: 2025.07.29.)
(6) 구로시오 통조림 (Kuro Can) 웹페이지. https://kuroshiocan.co.jp/ (접속일: 2025.07.29.)
(7) 강윤화 (2025.03.13.). “‘쓰나미 34m 예고’ 위기를 기회로 바꾼 일본 구로시오초 마을의 지혜”. 일요신문.
https://www.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488673
(8) Kanagaratnam, U., Schwarz, A.-M., Adhuri, D., & Dey, M. (2006). Rehabilitating mangroves in the West Coast of Aceh. World Agroforestry Centre (ICRAF). https://www.cifor-icraf.org/publications/downloads/Publications/PDFS/LE06514.PDF
(9) Mcivor, A., Spencer, T., Möller, I., & Spalding, M. (2018, May). Storm Surge Reduction by Mangroves. Mangrovealliance.org.
https://www.mangrovealliance.org/wp-content/uploads/2018/05/storm-surge-reduction-by-mangroves-1.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