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와 일하는 대기업 부장의 혼술 14

“저 퇴사하고 한동안 쉬려구요.”

by 박성훈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입사한 지 3년밖에 안 된 정사원이 황과장에게 퇴사를 통보했단다. 정사원을 자리로 불렀다.

“야, 정사원, 니 퇴사한다메(퇴사한다며)? 무슨 일 있나?”

“아닙니다 부장님, 그냥 제가 그동안 너무 열심히 달려온 것 같아서요, 저 퇴사하고 한동안 쉬려고요.

“야, 니 들어온 지 몇 년 됐다고 벌써 나간다 그라믄 어짜노(그러면 어쩌니). 직장이 무슨 동아리도 아니고.”

‘아차, 말실수다.’ 정사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아니, 내 말은 그기(그것이) 아니고, 직장 경력이 한 번 끊기면 다시 잇기 힘들어, 니 나중에 후회한데이.”

“후회하더라도 제가 선택한 결정이니까요, 잠시 쉬면서 뭘 하고 싶은지도 생각해보고 싶어요.”

“야, 그래도 잘 좀 생각해봐, 여기 아무나 들어오기 힘든 덴거(곳인 거) 알잖아. 곧 대리 승진도 준비해야지.”

“네, 저도 많이 생각해 봤어요, 대리 승진도 중요한데요, 그래도 벌써 IT 마케팅 일을 3년이나 해서요, 저한테 잘 맞는 일이 뭘 지도 좀 더 찾아보고 싶어요.”

정사원이 퇴사하면, 올해만 벌써 평사원 퇴사가 세 명째다. 팀에 신입을 한 명 받으면, 2~3년 차 평사원이 대리 승진도 포기하고 퇴사해 버린다. 팀 내에 대리 승진 대상자가 없을 정도다.

‘대기업에 다시 입사하기가 쉬운 줄 아나, 다 지(자기)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지.’

소주가 땡긴다. 시계를 보니 벌써 퇴근 시간이다.


두 명이 동시에 걸으면 어깨를 부딪칠만한 골목을 지나 허름한 설농탕 집으로 들어선다. 입구에 미슐랭 가이드에 올랐다는 광고판이 보인다. 테이블은 거의 다 차 있지만, 다행히 기다리지 않고 앉을 수 있었다. 저녁 손님들은 내 나이 때 직장인들이거나 어르신들로 대부분 수육에 소주를 곁들이고 있다.

“사장님, 특 하나.” “소주도 한 병 주세요.”

여기 설농탕을 소주랑 곁들이려면 ‘특’을 시켜야 한다. ‘보통’을 시키면 소주 한 병을 마실 때쯤 고기가 아쉽다. 특은 마지막 잔까지 넉넉함을 준다. 밥이 국밥 그릇에 말려서 나오지만 토렴(그릇에 밥을 넣고 국물을 여러 번 부었다 비웠다 반복하는 것)을 하고 나와서 마지막 숟갈까지 밥이 퍼지지 않는다. 그래서 소주랑 곁들일 때 굳이 수육을 시키지 않아도 ‘특’이면 고기와 국물까지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잘 익은 깍두기를 접시에 덜고 벽에 붙은 연예인들 사인을 보고 있자니 바로 소주랑 탕이 세팅된다. 너무 맑지도 너무 탁하지도 않은 국물은 심지어 짜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싱겁지도 않다. 은은담백한 맛이다. 이것이 120년 된 서울 최초 음식점의 내공이다.

얇게 썰린 고기 한 점을 깍두기 하나랑 집어 먹고 소주를 한 잔 쭉 비운다. 우리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긴 몇 안 되는 말씀 중 하나는 ‘첫 잔은 천천히 마셔라’라는 말씀이셨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아들이 술 마시다 상사보다 먼저 취할 것을 걱정하셔서 하신 말씀일 것이다. 첫 잔을 천천히 마시면 술에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임상시험에 당신 자신을 내몰았을까. 그 임상시험의 결과로 그의 아들은 수많은 술자리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오늘은 첫 잔을 쭉 비우고, 취하고 싶은 날이다. 고기 한 점과 깍두기 하나를 입에 넣고 또 소주 한 잔을 쭉 비운다. 은은담백한 국물에 채 썬 파를 듬뿍 넣어 한 숟갈 떠먹는다. 은은아삭담백하다.

몇 달 전 황과장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정사원이 황과장과 면담을 하다가 나에 대한 불편함을 얘기했단다. 업무 지시가 명확하지 않고 자꾸 알아서 해 오라고 하고, 경상도 사투리는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단다.

정사원을 붙잡지 못했다는 게 모두 내 잘못 같다. 소주 한 잔을 쭉 비운다. 벌써 취기가 올라온다.

‘내가 명색이 인사조직 박사 딴 사람인데…, 이게 다 지가 스스로 알아서 하다 보면 업무 실력이 느니까 일부러 지시를 그렇게 한 거지.’


포트폴리오 경력(Portfolio career)이라는 개념이 있다. 피터 트러커와 함께 세계적인 경영사상가로 불리는 찰스 핸디(Charles Handy) 선생님이 만든 개념이다. 찰스 선생님은 1990년대 초에 이미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유연한 포트폴리오 경력이 일상화될 거라 내다봤다. 1990년대 초면 우리나라에 이제 막 삐삐가 보급되고, 아직 휴대전화도, 아니 씨티폰도 일상화되지 않을 때였다.

그 당시 선견지명이 있던 선배 직장인이 친구를 앉혀 놓고 주식 강의를 하던 유튜브 쇼츠를 본 적이 있다.

‘니 삼성전자라고 아나? 니 에스케이텔레콤은 아나? 그 주식을 좀 사놔봐래이(사 보아라). 나중에 사람들이 손에 휴대폰이라 카는 거를 하나씩 들고 댕기는 날이 올끼데이. 그라믄 그 회사 주식이 억수로 오를끼다.’

‘야, 길거리마다 공중전화가 널렸는데 그 무거운 걸 와 들고 댕기노! 그라고 임마, 돈은 땀 흘려서 벌어야지 무슨 주식이고. 평생 우리 회사 댕기믄 퇴직금도 딱 저기 어디 아파트 한 채 살 만큼 준다 아이가.’

하지만 그 친구는 평생 집 한 채를 못사셨다는 얘기가 있다. 이러던 시절, 찰스 선생님은 이미 직장인이 한 기업에 오래 다니기보다는 유연하게 경력을 바꾸는 세상을 예견했다. 찰스 선생님은 ‘코끼리와 벼룩’이라는 표현을 썼다. 코끼리(기업)에 의존하지 말고, 벼룩(개인의 유연한 경력)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당신 자신은 대기업 셸(Shell)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는데, 그런 걸 어떻게 깨달으셨을까?

어쨌든 찰스 선생님의 예견처럼, 벼룩이 점프하듯 경력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물론 아직 우리 나이 때 부장들에게는 이상해 보인다. 우리 나이 때 사람들에게 ‘밖은 춥고, 험한 곳’이며, 꼬박꼬박 월급 주고 퇴직금 쌓아주는 ‘기업이 따뜻하고 안전한 곳’이다. 인사조직 분야 박사를 따고 대기업에 입사한 후 한결같이 IT 마케팅만 해 온 주부장은 앞으로도 IT 마케팅밖에는 못 할 것 같다. 밖이 추울까 봐 겁이 난다.

하지만 포트폴리오처럼, 벼룩처럼 경력을 점프하는 MZ는 다르다. IT 마케팅을 하던 친구가 IT 개발자로 점프를 할 수도 있고, IT를 활용한 유통 쪽으로 점프를 할 수 있다. 이 다양한 경력이 쌓여 그 친구는 나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직장인이 될 것이다. 혹은 그 다양한 경력에서 발견한 사업기회로 본인의 IT 벤처를 창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소주 한 잔을 쭉 비운다. 잘 익은 깍두기를 김칫국물까지 숟가락으로 퍼서 국물에 넣는다. 심심하던 국물 맛이 이제 제법 해장하기에 딱 좋은 술국으로 바뀌었다. 소주를 한 잔 더 들이킨다. 소주가 달다. 큰일이다. ‘갈지 자(之)’로 집에 들어가게 생겼다. 그래도 술이 계속 들어가는 건 정사원의 경력 점프가 부럽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너무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120년 된 설농탕 집도 메뉴 변경에 관한 온갖 유혹이 있었을 것이다. 여느 설렁탕 집이라면 하나씩 곁들임 메뉴로 파는 ‘손만두’를 추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집은 고집스럽게 자기 영역을 지켰다. 도가니, 소머리, 마나(소의 비장) 정도로만 ‘소’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메뉴를 늘렸다. 심심한 국물맛도 지켰다. 젊은 사람들 입맛에 맞춘 다른 프랜차이즈 곰탕집처럼 미리 감칠맛을 넣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 손만두를 추가했든, 그게 잘 팔려서 만두전골까지 추가했든, 그게 정답인지 누가 알겠나? 설농탕으로 미슐랭 가이드에 오른 이 집이 만두전골로 또 오르지 말라는 법도 없다. 만약 그 메뉴를 넣었다면… 그건 모른다. 가보지 않았고,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니 어차피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정사원의 앞길도 내가 재단해서 맞다 틀렸다 할 수 없다. 오히려 대기업 IT 마케팅 직원의 길은 내가 쭉 가봤 으니 그 끝은 예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커리어 점프를 앞 둔 정사원이 원하는 결말은 아닐 것이다. 그에게는 나보다더 넓은 세상이 무한하게 열려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커리어를 점프하더라도 일정한 패턴에 따라 점프한다는 점이다. 자기가 선호하는, 혹은 추구하는 방향으로 점프한다. 에드가 샤인(Edgar Schein) 교수님의 경력 닻 이론(Career anchor theory)이 있는데, 사람들이 경력을 선택하거나 변화시킬 때, 자신도 모르게 중심을 잡아주는 ‘닻’이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에드가 선생님이 제시한 여덟 가지 닻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고 싶어 하는 성향(기술), 조직 내에서 책임을 맡고 싶은 성향(관리), 타인의 통제 없이 스스로 일하고 싶어 하는 성향(자율), 장기적 고용과 재정적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안정),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싶은 성향(기업가정신), 사람이나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은 성향(헌신), 어려운 과제를 극복하고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성향(도전),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성향(균형)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어떤 성향이 옳거나 더 좋다는 기준은 없다. 결국은 자기 성향대로 자기만의 길을 찾아간다는 뜻이다.

경력 닻 이론을 만든 에드가 선생님도, 포트폴리오 경력 이론을 만든 찰스 선생님도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태어나 90세를 넘어 사시고 각각 2023년과 2024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 오랜 시간을 경영이론을 정립하는데 애썼던 분들이 남기고 간 깨달음이 ‘경력 점프가 나쁜 게 아니다’, ‘경력에 변화를 주더라도 다 자기 성향에 따라 변화를 준다’, 결국 ‘정답이 없다’는 깨달음이다.

다만 이런 깨달음은 젊었을 때는 잘 오지 않는다. 그래서 MZ들은 자신의 성향을 모른 채 벼룩처럼 막 점프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제삼자 관점에서 관찰해 온 선배가 후배들이 자기 성향에 맞는 경력을 잘 찾아갈 수 있게 돕는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래서, 후배에 대한 선배의 응원이 필요하다.

나 스스로 모범을 보여주면 더 좋겠지만, 우리 나이 때 사람들이 그게 잘 안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적어도 회사를 나가겠다는 MZ에게 ‘직장이 동아리냐’ 이런 표현을 써서는 안 된다. 첫째는 경청하고 탐색해야 한다.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들어봐도 될까?’ 이런 질문을 하고 들어봐야 한다. 둘째는 가치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나중에 후회한다’ 이런 표현은 안 된다. 셋째는 경력관의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 직선형이든 순환형이든 정답이 없는 게 우리 선생님들이 알려주신 깨달음이다. ‘경력의 경로를 잠시 멈추고 방향을 다시 잡는 것도 좋은 선택일 수 있어’ 이런 말이 튀어나올 수 있게 연습해보자. 마지막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감사를 표현하자. ‘쉬는 동안에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줘. 그동안 고생 많았어, 덕분에 팀이 많이 성장했어’ 이렇게 말이다.

두 병을 거하게 비우고 설농탕 집을 나섰다. 나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건다.

“네, 부장님.”

“야, 정사원, 니는 말이야… (쓰읍) 뭘 해도 잘 할끼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제. 응? (쓰읍) 니는 뭘 해도 잘~ 될끼다~ 이말이야. 니가 부럽데이, 힘내라, 응?”

“네, 감사합니다 부장님.”

전화를 끊었다. ‘짜식, 오늘은 퇴근 후에 전화했다고 머라(뭐라) 않네.’

인사동이나 한 바퀴 돌고 술 좀 깨야겠다.

벌써 ‘갈지 자(之)’로 걷고 있다. 나는 곧게만 걸어왔다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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