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와 일하는 대기업 부장의 혼술 7

“그냥 상무님한테 바로 보고하면 안 돼요?”

by 박성훈

작년 말, 상무님이 또 어디선가 리더십 강의를 듣고 오셨다. 우리 조직도 올해부터 ‘수평 조직’이란 걸 해보자고 하신다. 가장 먼저 생긴 것이 ‘직보(직접 보고)’ 체계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나대리가 쭈뼛쭈뼛 주부장 자리에 찾아왔다.

“부장님, 이번 보고요, 상무님이 직보하라고 하셔서요, 저희끼리 준비했는데 내일 상무님께 바로 보고 드려도 될까요?”

“그래? 그러면 갖고 와봐. 내가 봐야지. 그러지 말고 지금 다 같이 회의실에 가지.”

나대리가 당황한다. “아니, 부장님, 그게 아니고요, 저희끼리 다 만들었어요. 그리고 지금 퇴근 시간이라서요.”

“그래도 그거 숫자 하나라도 틀리면 큰일난데이. 마케팅은 숫자가 생명이야. 확인을 내가 해야 상무님도 안심하시지.”

“부장님, 그런데요… 상무님도 우리가 수평 조직이라면서 굳이 중간에 거치지 말고 직접 보고하라는 뉘앙스셨거든요… 그냥 상무님한테 바로 보고하면 안 돼요?

“야, 그럴 거면 나한테 왜 물어봐, 그냥 느그끼리(너희끼리) 보고하지.”

“그게 아니고요… 저희끼리 보고하면… 부장님이 기분 나빠하실 것 같아서요.”

말문이 막힌다. ‘아니, 내가 뭐 즈그들끼리(자기들끼리) 보고 했다고 뭐라 할 것도 아니고, 나를 뭘로 보고…’

술이 땡긴다. 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다.

종각역 근처에 일본 상사가 입주해 있는 건물의 지하상가에 주부장의 단골 이자카야가 있다. 혼자 오는 손님은 칸막이가 쳐진 2인 테이블에 앉거나 카운터석에 앉으면 된다. 자리에 앉으면 일본인 종업원이 기본 안주인 삶은 풋콩과 ‘오늘의 메뉴’가 인쇄된 종이를 가져다준다. 오늘의 메뉴는 그날의 재료에 따라 매일 바뀐다.

“마스자케 한 잔요.”

마스자케는 ‘마스’라는 네모난 히노끼(편백나무)잔에 서빙되는 사케다. 한 뼘 정도 되는 높이의 사기 술잔을 마스 잔 안에 넣고 사케가 잔을 넘쳐 마스 잔까지 흘러넘치게 따른다. 이 넘치게 따르는 걸 ‘후루마스’라 하고, ‘인심이 넉넉하고, 복이 넘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끔 무늬만 이자카야인 술집에 가면, 한국인 직원분이 후루마스의 의미를 모른 채 사기 술잔에만 딱 칠 부(70%) 정도 사케를 담아 마스 잔을 받침처럼 받혀 서빙해 준다. 소주잔에 소주를 칠 부 따르던 버릇 그대로 말이다. 소주잔에 소주를 너무 꽉 채워 따르면 선배들한테 ‘나를 애정하는 만큼 따른 거냐’, ‘나 좋아하냐’ 느끼한 한소리씩 들어왔기 때문에 생긴 버릇이다.

“계란말이도 하나 주세요.”

마스자케가 나왔다. 사기 술잔에 가득 담긴 사케가 차고 넘쳐 마스 잔에도 반쯤 술이 채워져 있다. 마스타(마스터, 주인)의 환대가 느껴진다.

사기 술잔에 가득 차 있는 술의 윗부분을 한 모금 쭉 마셔 쏟아질 위험을 줄인 다음에, 술잔의 술을 모두 마스 잔에 따른다. 사기 술잔에 마시는 것보다 마스 잔으로 마시는 게 편백나무 특유의 향이 은은하게 올라와서 더 좋다.

‘내가 명색이 인사조직 박사 딴 사람인데, 수평 조직이 뭔지도 모를까 봐. 상무님 앞에서 즈그들(자기들) 실수해서 혼나지 말라고 그러는 거지.’

전통적으로 대기업은 ‘위계(Hierarchy)형 구조’다. 그런데 최고경영자의 성향에 따라 수평적 조직 문화를 부르짖기도 한다. 이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여러 직급을 통폐합시킨다. 회사에 갓 입사한 직원부터 입사 20년 차 직원까지 모두 ‘매니저’로 불린다. 서로 직급을 부르지 않고 영어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우리 부장들은 마치 영어 회화 학원에 와 있는 기분이다. 아마 젊은 직원들은 온라인 동호회 정모에 와 있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매튜님~’, ‘님은 붙이지 마!’, ‘네, 매튜~.’ 뭐 이런 분위기이다. 참고로 왜 갑자기 ‘매튜’냐 하면, 주부장의 애송이 시절 영어 이름이 ‘매튜’다. 주부장이 압구정 술집의 주방 보조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 술집 사장님이 이름을 정해 주셨다. 주부장의 관상을 보더니 ‘너는 매튜다. 딱 책 쓰게 생겼네.’라고 말했다. 매튜는 마태복음을 쓴 마테오다. 왠지 술집 바텐더로 일하기엔 고지식하게 생긴? 겉늙은? 매력 없게 생겼다는? 뜻 같았다.

어쨌든, 명색이 인사조직 박사로서 단언컨대, 직급을 통폐합하고, 영어 이름을 부르는 방식만으로는 절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조직의 구조는 위계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말로만 ‘수평 조직’을 외친다고 수평이 만들어지겠냐는 말이다. 다 같은 매니저인데 여전히 나이 든 매니저가 젊은 매니저가 올린 보고서에 대한 결재권을 갖고 있고, 인사권도 갖고 있다면 ‘매튜~’라고 아무리 불러 봤자, 그건 ‘부장님~’일 뿐이다.

수평 조직을 만들고 싶다면 위계 구조부터 확실하게 없애야 한다. 그런데 위계 구조가 없어지면 우리 부장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결재권도 없어진다. 인사권도 없어진다. 대리 과장이 보고서 초안을 만들어오면 고쳐주고 임원 보고도 하는 게 우리 일이었는데 그 역할도 없어진다. 그러면 우리 부장들의 존재 이유는 뭐가 남는 것일까? 이런 걱정 때문에 수평 조직을 만들겠다는 선언은 우리 부장들에게는 ‘너 이제 나가’라는 선언으로 들린다.

성공적으로 수평 조직이 정착된 기업은 위계 구조가 아닌 네트워크(Network)형 구조를 가져야 한다. ‘가져야 한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걸 성공시킨 기업이 거의 없다는 얘기이다. 어쨌든 수평 조직의 네트워크형 구조는 위계 구조와는 달리, 권한과 정보가 분산되고, 구성원 간의 연결과 협업이 중심이 되는 구조다. 이 구조는 위계 최소화, 구성원들의 자율적 연결, 정보의 개방적 공유, 역할 중심의 유연한 팀 구성, 의사결정의 분산화라는 특징이 있다. 아니, 이론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위계 구조와 네트워크형 구조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수직과 수평의 차이만 알면 된다. 어느 조직이나 업무를 위한 정보와 자원이 흐르고 의사결정이 끊기지 않고 연결되어야 하는데, 위계 구조에서는 정보, 자원, 의사결정이 수직으로 흘렀다면, 네트워크형 구조는 이것이 수평으로 흐르는 차이일 뿐이다.

정보, 자원, 의사결정을 효율적으로 흐르게 하려는 속성 때문에 네트워크형 구조는 기존 위계 구조의 관성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네트워크형 구조를 성공시킨 기업이 거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만 위계는 없어서, 위계 대신 ‘허브(Hub)’라는 네트워크의 중심점이 생겨난다. 허브 앤 스포크 리더십(Hub and spoke leadership)이란 개념이 있는데, 허브가 있어서 각 스포크(개별 팀이나 팀원)가 효율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허브 역할이 없으면 어떤 곳은 정보가 부족하지만, 어떤 곳은 과잉되고, 업무 충돌이 생기고, 중복 업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브 앤 스포크 리더십에는 좋은 의미만 있는 건 아니다. 모든 정보, 자원, 의사결정이 허브를 취하고 있는 리더를 중심으로만 흘러서, 팀원 간의 직접적인 연결이나 소통은 줄어들게 된다. 리더가 허브 위치를 취하려는 전략은 협업의 실패를 불러오는 원인으로 지적받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 부장들이 수평 조직에 제대로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허브 위치를 취하려는 전략보다는 자율적 네트워크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스스로 권한을 내려놓아야 한다.

다만 본인의 생존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쓸모를 만들어야 한다. 첫째, 교통정리 역할을 해야 한다. 팀원들은 ‘수평적 협업’을 선호하지만, 결국 각자 목표와 업무 방향이 달라 충돌한다. 부장은 개별적인 목표가 아닌 조직의 목표를 내세워 이 충돌을 방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둘째, 투명한 정보 공유자가 되어야 한다. 수평 조직에서 정보 독점은 동맥경화를 만든다. 불신이 생긴다는 뜻이다. 불신은 개별 행동을 더 키워 전체 목표 달성을 어렵게 한다. 셋째, 번역가가 돼야 한다. 아무리 수평 조직이라도 임원과의 소통은 필요하다. 부장은 임원의 언어를 팀원의 언어로 번역해야 하고, 반대의 번역도 해야 한다. 팀원의 창의적 아이디어도 임원의 언어로 이해될 수 있게 정리해줘야 한다.

계란말이가 나왔다. 일본식 계란말이는 가다랑어 포 육수나 다시마 육수로 맛을 내고 청주로 비린 맛을 잡는다. 계란을 다 만 다음에는 김밥을 말 때 쓰는 김발로 감싸 몇 분 식혀둔다. 그러면 김발의 결이 계란말이에 입혀진다.

이 집 계란말이의 특징은 ‘간 무(오로시)’를 같이 준다는 것이다. 계란말이 한 점에 간 무를 듬뿍 얹고 그 위에 젓가락으로 톡톡 간장을 더해 한 입 크게 베어 문다. 가쓰오 육수의 맛이 배어 나오는 계란말이에 시원한 무즙과 진한 간장 맛이 더해져 고급진 맛이 난다. 달큼깔끔하다.

사실 ‘간 무’가 없어도 계란말이는 계란말이다. 그런데 ‘간 무’가 더해져서 맛의 균형을 잡아준다. 일본식 계란말이는 설탕, 맛술, 가쓰오 육수가 더해져 달콤하다. 식감은 부드럽고 속은 뜨겁다. 간 무는 약간 쌉싸름한 맛이 있어, 입안에 남는 단맛을 정리해주고 감칠맛을 더 선명하게 해준다. 간 무의 씹는 맛이 계란말이의 부드러운 식감과 조화를 이룬다. 또 뜨거운 계란말이를 간 무가 차갑게 식혀준다.

임원이 어디선가 리더십 강의를 듣고 와서 수평 조직을 부르짖는다면, 위계 구조는 그대로 유지한 채 어설픈 수평 조직의 흉내만 낼 가능성이 크다. (어설픈 흉내라고 표현한 이유는, 진짜 수평 조직을 만들고 싶다면 본인 자리부터 빼야 한다. 그런데 안 그럴 거잖아. 그러니 ‘흉내’라는 거다.)

대신 어설픈 직보체계 같은 걸 만든다. 임원은 수평 조직의 장점인 ‘창의성’이 더 발휘되고, 업무 ‘속도’가 더 빨라지길 기대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업무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또 원하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는 ‘에자일(Agile, 실시간 피드백을 반영하여 유연하게 수정하는 방식)’하게 일하라고 얘기하면서도 중간 과정의 품질도 하나하나 완벽하길 바란다. 우리의 직속 임원도 더 높은 임원에게 완벽하게 보고하고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부장이 취할 수 있는 생존 전략은 무엇일까?

스스로를 창의성을 훼손하고 속도를 떨어뜨리는 ‘간섭자’가 아니라, ‘품질 보증자’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세한 수정은 건너뛰어야 한다. 오직 큰 실수와 시사점만 잡아주면 충분하다. 반나절 이상 보고서를 껴안고 있어서도 안된다. 논리적인 완결성이 떨어지는 제안이 있더라도 젊은 직원들의 창의적인 제안이라면 양념을 뿌려 더 돋보이게 해줘야 한다. 보고서를 받자마자 ‘원 포인트’로 피드백을 주고 팀원들이 직보할 수 있게 넘겨줘야 한다.

팀원들의 임원 직보가 늘어나면 부장의 관리 범위(Span of control)는 줄어든다. 그렇다고 나의 쓸모가 없어지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품질 보증자가 되어 관리의 깊이(Depth of control)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팀원들에 대한 나의 쓸모도 유지해야 한다. 팀원들이 임원에게 직접 보고하면 ‘찍히면 끝이다’는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부장은 품질 보증자로팀원의 심리적 안전망이 되어야 한다. 위, 아래에 모두 나의 쓸모를 유지하는 것, 이것이 우리 부장의 생존 전략이다.

임원과 합의된 룰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임원에게 ‘직보를 통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받고, 업무 속도도 높이는 것은 좋습니다. 다만, 보고서의 퀄리티 체크는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부장이 위계 상 거치는 단순 관문이 아니라 책임 있는 ‘품질 보증자’의 위상을 임원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아마 임원 대부분은 오히려 안심하고 좋아한다.

마지막 계란말이 조각에 간 무를 얹고 톡톡 간장을 더해 한 입 베어 문다. 간 무가 없었어도 계란말이는 아주 맛있었겠지만, 간 무가 더해져 풍미가 더 산다. 간 무의 ‘원 포인트 역할’이 그만큼 크다. 마스 잔의 남은 사케도 쭉 들이켰다. 편백나무향이 은은하게 코에 머문다.

아예 오뎅(어묵의 일본말)을 하나 시켜서 본격적으로 마셔볼까 하는데, 나대리한테서 전화가 왔다.

“부장님… 저 퇴근 후에 전화 드려서 죄송한데요, 내일 상무님께 직보할 보고서에 데이터 하나만 검토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끼리 좀… 안 풀리는 게 있어서요”

“어, 어, 그래, 그래. 너네 어데고(어디냐?).”

“저희 지금 회의실에 모여 있어요.”

“어, 어, 그래, 내 금방 가께. 느그(너희들) 저녁은 먹었나. 머 좀 사가까(사갈까?).”

이자카야 홀 손님 모두가 깜짝 놀랄 정도로, 바바리 코트를 크게 휘두르며 입는 어깨에 힘이 불끈 들어간다.

‘한 잔만 마시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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