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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효샘 Nov 23. 2017

그냥. 눈이 와서

응답하라, 1997


가끔 스물 몇 살의 나를 떠올린다.

그때의 나는 몹시도 오만했기에,

아직 살아갈 날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걸 거추장스럽게 생각했다.

심지어는 전혜린 에세이 제목처럼,

불꽃처럼 살다가 서른 전에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인생은 되는대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오래 기억할 의미있는 것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랑도 그러했고, 만남도 그러했고, ... 이별도 그러했다.

그런데 내가 지우고 싶던 모든 것이 

인생에선 언제나 의미있는 것으로 남아버린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때 내가 만나던 사람은 돈이 없는 날이 많았다.

그뿐 아니라  나도 돈이 없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젊고 한없이 가난한 커플이었던지라...

가끔 기름 살 돈이 없어서 겨울에도 보일러를 돌리기 힘든 작은 자취방에

나란히 앉아서 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어느 눈 오는 밤이었다.

마침 냉장고에 먹다 남은 소주와 새우깡 한 봉지가 있었다.

"우리가 먼 훗날에 이때를 돌아보면 뭐라고 할까."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고 한 마디,

"뭐라고 하긴. 그땐 왜 그렇게 가난했을까 말하겠지."

다시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고 한 마디,

소주를 마시지 않으면 추워서 입김이 나오는 현실이 그대로 바라다보였기에,

술잔은 끝없이 비워졌다. ...

"아니야. 우린 지극히 정상이지. 우리 나이에 돈이 어딨어. 가난한 게 정상이지."

월세 6만원짜리 방 한 구석에서 그렇게 소주를 홀짝이며 마시는 동안

바깥으로는 소리없이 소복하게 눈이 내렸고,

길은 얼어붙었고, 얼마 남아있지 않던 기름은 곧 떨어졌다.


그날 기름을 사러 눈길을 걸어야했다.

작은 들통 하나를 들고, 한 시간 넘게 걸어서 간 주유소에서 다시 기름을 사들고

돌아오는데, 문득, 정말로 문득,

짜증이 났다.

"나 너 만나는 거 싫어. 이게 뭐야. 이 추운 날에 기름 사러 한 시간을 걸어서 주유소에 가다니."

.. 입김이 훅, 내밀어지고, ... 눈이 다시 내리고, 길은 사람이 지나지 않았다.

"왜 갑자기."..

그는 머뭇거렸다.

"그냥. 가난하고 가난하고 또 가난하고."

발끝에 쌓인 눈을 길바닥에 툭툭 털었다.

"아니야. 우리집 돈 많아."

"그럼 왜 지금 기름 한 통 사러 한 시간씩 걷는 건데."

"그거야 우리 엄마가 돈이 많은 거고, 나는 돈이 없어서지. ... 미안해."

그래, ... 아니, ... 그가 왜 미안할 일인가.

안다. 나도. 그의 어머니는 보디가드를 데리고 다니는 큰손이었다.


우리집 보일러에 기름이 조금 남아있는 게 떠올랐다.

"미안해 하지 마. 사실은 내가 미안해. 짜증 부려서. 추워서 그랬어. 발 시려워."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기름 팡팡 때고 지내자."

그 말에 나는 웃었던가. 아니면 그를 쏘아보았던가. ...

그 말이 끝날 즈음 나는 내 자취방 앞에 서있었다.

"다 왔네. 잘 자. 추우니까 오늘은 기름 아끼지 말고 꼭 따뜻하게 하고 자."

그렇게 말하는 그의 머리 위로 눈이 쌓여 있었다.


... 아마도 그는 이제 돈을 많이 벌면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기름도 아낌없이 때고 있겠지. ...


어쩌면 오늘도 눈 오는 어느 골목에서

어린 커플이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를 할 지 모르겠다.

기름값을 걱정하면서,

먼 훗날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말하면서...


눈이야 내리든 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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