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구조와 저항의 한계
시스템적 폭력의 무의식적 작동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등장인물들이 자신도 모르게 시스템적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남편, 가족들, 회사 동료들 모두 영혜의 채식 선언을 '이상행동'으로 규정하고 '정상성'의 이름으로 그녀를 억압한다. 이들에게 영혜의 거부는 단순한 일탈이며, 자신들이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자각은 전혀 없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영혜가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없어 결국 자해로 향하는 모습이다. 이는 피억압자가 분노를 외부로 향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돌리는 전형적인 패턴을 보여준다. 회사 모임에서의 비인간적 취급, 가족들의 강제 급식, 그리고 최종적으로 분수대 앞에서 옷을 벗고 "안 돼?"라고 묻는 영혜의 모습은 문명사회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원시 회귀라는 한계적 저항
하지만 작품이 보여주는 저항의 방식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혜의 선택은 원시로의 회귀, 문명의 거부에 머물러 있다. 나무가 되고 싶어 하고, 햇빛과 물만으로 살고자 하는 그녀의 욕망은 강렬하지만,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이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존이 문명을 거부하다 결국 자살로 끝나는 것과 유사한 절망적 결말이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관찰당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극단적인 문명 거부를 통해 저항하지만, 그 너머의 건설적 비전은 제시하지 못한다. 결국 독자에게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숙제로 남겨진다.
복잡한 현실과 폭력의 연쇄
이 작품을 읽으며 더욱 고민스러웠던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남편 역시 사회적 압박과 기대 속에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또 다른 피해자일 수 있다. 영혜의 극단적 거부가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정서적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관점도 간과할 수 없다.
상처받은 사람이 그 상처에 갇혀 다른 이에게 반대의 폭력을 행사하는 악순환의 가능성도 우려된다. 특히 이런 작품들이 "우리는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고착화시켜 트라우마 극복을 더욱 어렵게 만들 위험성도 있다.
문학의 역할과 현실적 과제
물론 소설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만약 영혜가 상담을 받고 점진적으로 회복되는 이야기였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닌 자기 계발서가 되었을 것이다. 한강은 의도적으로 "해결책 없는 절망"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 작품이 던진 문제의식을 현실에서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는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시스템적 폭력을 인식하되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상처를 딛고 건설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소통과 이해, 점진적 변화,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경계 설정이 필요하다.
결론
『채식주의자』는 가부장제와 폭력의 구조를 날카롭게 해부한 뛰어난 작품이다. 하지만 그 극단적 결말이 주는 절망감 너머에서 우리는 더 나은 삶의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문학이 현실의 어둠을 폭로했다면, 이제 그 어둠을 극복할 지혜를 현실에서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