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움의 잔혹함
다성적 서술이 던지는 질문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설이지만, 단순한 역사 소설의 범주를 넘어선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각 장마다 화자와 서술 방식을 달리하여 하나의 사건을 다층적으로 조명했기 때문이다.
1장에서는 죽은 동호가 1인칭 현재형으로, 2장에서는 생존자 정대가 1인칭 과거형으로, 3장에서는 고문 피해자 은숙이 2인칭으로 자신을 거리 두며, 4장에서는 생존 죄책감에 시달리는 진수의 친구가 3인칭으로, 5장에서는 성희 언니의 동생이 시간대별로, 6장에서는 동호 어머니가, 그리고 에필로그에서는 작가 자신이 등장한다.
이러한 다성적 구조는 집단적 트라우마가 개인에게 미치는 서로 다른 영향을 보여준다. 같은 사건을 경험했지만 각자가 느끼는 고통의 질과 깊이는 전혀 다르며, 그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 또한 다르다. 작가는 서술 방식 자체를 변화시켜 극한 상황에서 언어가 갖는 한계를 뛰어넘으려 시도한다.
'인간다움'이라는 잔혹한 덫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불편했던 것은 '인간다움'이라는 개념이었다. 동호가 시체들을 돌보고, 은숙이 금서를 출간하고, 중고등학생들이 죽음을 알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려 한 행동들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간다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누가 이것을 인간다움이라고 정의했을까?
만약 동호가 어머니 말을 듣고 집에 있었다면, 은숙이 검열에 순응하며 평범하게 살았다면, 그들의 삶은 어땠을까? 아마도 지금과 같은 평생에 걸친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선택을 '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해외 파병에서 살인 기술을 익힌 장교들이 국내에서 그 기술을 사용하는 모습에서 보듯이, 트라우마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괴물이나 희생자로 만든다. 그런데 그 상황을 만든 권력자들은 상황에 따라 말을 바꿔가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반면, 평범한 사람들은 그 순간의 선택 때문에 평생을 고통받는다.
권력과 개인의 비대칭성
역사 속에서 개인은 거대한 사건 앞에서 압도적으로 무력하다. 권력자들의 의도든 그렇지 않든, 우리 같은 소시민들은 그 앞에서 나약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인간다움'이라는 선택을 통해 평생을 고통받으며 살아가야 할까?
특히 중고등학생들이 보인 행동은 미스터리다. 아직 가치관이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나이에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마치 정의감이나 연대감이 학습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내재된 무언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순수한 충동이 현실의 폭력과 만나면서 평생의 고통이 된다.
동호 어머니의 의미
작가가 동호 어머니의 이야기를 가장 뒤에 배치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머니는 아무런 '숭고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들을 기다렸을 뿐이다. 그런데 그 기다림이 다른 모든 선택들만큼 고통스럽고 의미 있다.
모든 '인간다운' 선택의 뒤에는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다. 동호의 선택은 동호만의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평생 고통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아들을 기다린 것 외에 무엇이 있었나? 이 질문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아픈 진실인 것 같다.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간 사람들, 검열에 순응해서 안전하게 살아간 사람들을 우리는 욕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현명했을 수도 있다. 생존 본능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인간다움'보다 덜 중요한 가치일까?
나 역시 그 상황에서는 동호나 은숙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그 선택이 왜 필요했는지, 왜 우리가 그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해답 없는 질문의 가치
결국 이 소설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인간다움'이나 '숭고함'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어쩌면 한강이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다움의 숭고함'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잔혹함'일 수도 있다.
트라우마가 인간다움의 대가라면, 완전히 무감각해지면 고통은 없겠지만 그러면 인간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여전히 쓰고 있고, 기억하고 있다.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그 고통을 나누고 증언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일 것이다.
이 소설은 단순히 과거의 비극을 기억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선택의 대가는 누가 치러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 자체가 이 소설의 가장 큰 가치이자 우리가 끝까지 안고 가야 할 무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