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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lip Mar 10. 2021

소회(所懷)

세계 여성의 날을 지나 보내며,

    세계 여성의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아직도 잡음이 많이 들리 운다. 탐탁지 않다.


    내 어머니의 언행은 때론 매우 폭력적이었다. 본연의 내재된 폭력성이 아니라 철저히 교조화 된, 대를 거듭하여 내려온, 철저히 타인을 위한 폭력. 자아가 결핍된 이들은 타인의 만족을 위하여 철저히 자신을 희생하는 일로 본인의 폭력성을 표출한다. 배를 곪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 본인의 의지로 피아를 분간함 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당신의 삶에는 모순된 시대의 맥락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곧장 공단으로 내몰려 미싱을 돌린 돈으로 삼촌들 뒷바라지를 하고, 십 수 시간의 고된 노동을 못 견뎌 도망친 고향 마을에서 친인척들에게 머리채 잡혀 다시 공단으로 팔리듯 떠넘겨지고, 하루 열여섯 시간씩 다시 부품처럼 방적기를 돌리고, 그러다 잠시 몸을 뉘었던 방적기에 찧어버린 오른팔 엔 영영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남고-


    그녀의 몸에 남은 상처보다 더 잔혹한 병은 그녀의 정신에 남겨졌다. 단 한 번도 본인의 의지로 본인의 삶을 선택치 못하였던 비극적인 삶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비천한 존재로 여기고, 자신의 삶이 타인을 위하여 쓰임을 당연히 여기며, 그녀에게 복속된 모든 것들 역시 그녀가 맹신하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내던져야 한다고 홀로 세뇌하며 이후의 생을 보내왔다.


    꼭 노비 마냥 내게도 대를 이어 올무가 씌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발을 잡아 끄는 이는 나의 어머니, 혹은 가족이라는 이름을 한, 어머니 근처의 승냥이 같은 이들이었다. 나는 부정한다. 그러면 내 어머니는 나에게 언행으로 린치를 가한다. 그럼 그녀를 둘러싼 이들이 사회적인 린치를 더한다. 내가 그 굴레를 피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내 어미를 저버리는 일, 그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개인의 삶은 철저히 그네들이 속한 집단과 맞닿아 있다. 야만의 시대, 결핍을 채우는 데 이용된 존재들은 여전히 작아진 채로 앉은뱅이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삶의 연속성으로 말미암아 그녀 주위에 남겨진 이들은 그 짐을 함께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이는 남녀의 문제가 아니다. 구한 말부터 적어도 100여 년을 이어져 온 양립한 사회의 구조에서 답을 찾고, 모자란 시대정신을 채워나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희생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이들이 죽은 철학자들을 부르짖는 일에 염증을 느낀다. 간간히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왜곡된 역사를 들먹이며 내로남불을 시전 하는 이들을 바라보노라면 머리 한쪽이 지끈거린다. 진정한 소통과 공감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논의가 멀리 평행선 두 줄을 그어놓고 서로 총질해댐과 크게 다르지 않아 안타깝다. 한편으로는 두렵기까지 하다. 나도 뜯어보면 그들과 똑같은 인간일까 봐. 그래서 과거에 하였던 다짐을 되새긴다. 시대정신이 결핍된 선택적 참여만 행하는 이들에 맞서기보단 내 자리에서 묵묵히 할 수 있는 행하겠노라고. 그렇게 나는 오늘도 차가워진다.


    짧은 호흡으로 쓰고자 하였던 글이 자꾸만 길어진다. 집중력이 점점 떨어지는 탓이겠지. 그저 잡음 만이 들리 운다. 탐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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