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바리 평화

너무 하찮은데, 나는 그게 좋아

by 오월

한때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무엇으로 표현하면 좋을까 싶었는데 이보다 더 적합한 단어는 없겠구나 싶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내가 추구하는 방향이었다.


이전에 누군가에게 내 취미를 소개할 때는 다소 난감했다.

이렇게 보잘것없고 하찮은데, 취미라고 부를 수 있을까?

독서, 음악감상, 그림 그리기와 같은 무언가 있어 보이면서도 흔한 취미들 가운데서 나의 취미를 소개하기엔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었다.

아니, 애초에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소확행이란 단어가 혜성처럼 등장한 이후, 나의 보잘것없는 취미를 소개하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1. 버킷리스트 작성

버킷리스트의 단어 정의가 죽기 전에 꼭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일이라고 한다.

어쩌면 평생에 걸쳐 작성하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버킷리스트인 것이다.

나는 정말 '냄비' 같은 사람이다. 시야에 들어온 새로운 것들을 보면 관심이 화르륵 불타올랐다가 시작도 채 해보기도 전에 정보탐색 단계에서 이미 모든 것을 이룬 사람처럼 관심이 사그라들곤 했다.

무엇이든 쉽게 싫증을 내는 나로서는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일을 고르라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여겨졌다. 미래를 생각하며 하고픈 일을 생각하고 기록하는 것은 좋지만 '죽기 전'이라는 광범위하고도 한정 없는 기한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가까운 미래를 먼저 그리는 훈련을 시작했다.

알만한 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는데 <만다라트 계획표>를 참고해서 매해 계획을 세웠다.

오타니 쇼헤이 선수, 만다라트 계획표

가장 중심에 이루고자 하는 최종 목표

그것을 중심으로 한 하위 목표

하위 목표를 이루기 위한 실천방안


만다라트 계획표 작성에 대한 방법을 수도 없이 검색해 보고 참고해서 작성해보려 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 실천방안까지는 기록하기가 어려웠다.

모든 계획들이 다 이루어졌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 해에 절반도 이루지 못하는 계획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해 만다라트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이유는 몇 년 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계획을 이루는 일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20~21년도에 작성한 버킷리스트는 텍스트로 그저 나열해 두고 틈틈이 이루었는지 확인했지만 22년부터는 계속 만다라트 기록방식을 활용하여 달성여부를 체크하고 있다.

가끔씩 생각날 때면 이전 작성해 둔 버킷리스트를 확인한다. 당시 내가 관심 있었던 것들, 꾸준히 내가 관심을 갖는 분야, 잊고 있었지만 다시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들이 있다.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나의 미래 모습을 그려보는 것. 거창하게 평생에 거쳐해보고 싶은 일을 기록하기보다 그저 오늘보다 조금 더 나아진 나를 그리는 과정이 즐겁다.



2. 사진 촬영

사진첩을 들어가 보면 내 앨범을 날것 그 자체이다.

내 얼굴이 박힌 사진보다도 숲, 하늘, 예쁜 카페 공간이 주를 이룬다. 가끔 유용한 정보를 캡처해 둔 온갖 정보들이 앨범 속에 뒤섞여있다.

정작 내 사진은 없지만 '찍는다'는 행위 자체는 좋아한다. 애정을 담아 피사체를 촬영하는 그 순간을 좋아하는 것 같다.

전문적으로 촬영기법을 배우지는 않았다. 그렇다 할 기술도 없다. 하지만 집에는 필름카메라와 최근 다시 유행하고 있는 빈티지 디지털카메라를 소유 중이다.

특히 작년에 큰맘 먹고 구매한 필름카메라는 나를 언제든 설레게 만드는 도구이다. 필름카메라를 들고 밖을 나서면 가까운 동네에 가더라도 그 걸음부터 기분이 다르다.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늘 보던 풍경조차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는 필름카메라와 함께 자라났다. 가족여행을 다니지는 못했지만 집 근처에 위치한 공원에 주말마다 오르면 엄마는 항상 슈퍼에서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구매해서 나와 동생의 모습을 담아주었다.

필름카메라에 담긴 모습은 이미 십수 년이 지났음에도 당시의 기억까지 생생하게 담아낸다.


필름.jpg
SAM_1260.JPG
좌) 필름카메라 / 우) 빈티지 디카


별 거 아닌 일상이지만 당시 무슨 생각으로 사진을 찍었는지 생생하게 기억되는 게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다.

가령, 어릴 적 엄마와 이모와 함께 보성 율포해수욕장에 놀러 갔던 기억과 초등학교 체육대회날 공연을 하던 나의 모습, 아이스크림 사주지 않아 입이 삐죽 나온 동생의 모습..

명절마다 엄마의 어린 시절 사진부터 나와 동생의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오는 이야기는 앨범을 뒤적일 때마다 당연한 코스처럼 밟아온다.

안타깝게도 나의 사춘기 시절부터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사진이 없으니 당시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앨범을 뒤적이다 다시 마음먹었다.


지나간 일상을 되돌리지는 못하더라도 앞으로의 일상은 앨범에 고이 정리해 두자고.



3. 카페에서 글쓰기

지출 내역을 상세히 살펴보면 언제나 상위권을 차지하는 항목이다.

커피 맛이 어떠한지, 산미가 있는지 다크로스팅인지. 예가체프니 콜롬비아니.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내 입에 깔끔하면 좋을 뿐이었고 사람이 적당히 있고 조용하면. 공간까지 내 취향으로 꾸며져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새로운 공간은 언제나 새로운 생각을 가져온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는 평소 삐죽한 나의 생각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낯선 곳에 존재하는 나를 제3자로 인식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주 여행 시 느낀 점 기록

평소에는 무슨 글을 쓸지 막막하다가도 새로운 장소에서는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겠지만 여행길에 비가 오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하다. 비바람이 몰아쳤고 우산도 없는데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비를 피해 카페에 들어섰다. 꿉꿉하고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지만 여행길이라 그랬을까. 오히려 색다른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옷은 쫄딱 젖고 길 위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몇 분을 길바닥에서 허비했지만 마냥 시간을 버린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웃긴 해프닝이었다.




나의 일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기록이었음을 한번 더 깨달았다.

과거 학교에서 학기 초 서류를 작성해 내야 할 때마다 나를 고민에 빠지게 했던 것. 취업 준비 활동 시 기록해야 했던 취미와 특기.

남들과 크게 튀어 보이지 않기 위해. 넌 애가 참 독특하다는 핀잔을 피하기 위해 나의 취향을 숨겼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나의 일상을 이루던 것들은 굳이 누구에게 평가받기 위함이 아니었는데.

나의 잔잔바리 평화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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