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 같지 않은 관용에 대하여
p.m. 7:39
새 직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달라진 점은 출근할 때 차를 끌고 나간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4호선 지하철에 타서 내릴 때가 되면 내리는 전 직장과는 달리, 새로운 직장은 거리 상 위치는 가까우나 대중교통으로 가기에는 애매한 판교이다. 차를 살까 고민했으나,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주식 때문에 나의 구매욕구도 떨어져 쉽사리 결정을 하지 못했다. 우선은 집에 남아 있는 아버지 차를 끌고 다녔다. 기름을 항상 채워놓는다는 조건 하에 부자간의 차량 공유는 극적 타결되었다.
7시 퇴근이나 적당히 야근을 하다 보니 30분 정도가 지났고, 직장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월요일 근무를 마친 나는 샤워 후 맥주 한 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p.m. 8:13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항상 비워져 있는 지하 2층으로 내려가고자 좌회전을 하고 있는 찰나 고막을 의심케 하는 문 긁힘 소리가 들렸다. 당장 멈추고 다시 후진해서 나와야 하나,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판단력이 흐려지는 나의 단점은 여실히 드러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액셀을 밟았고 그렇게 접촉된 상황을 빠져나왔다. 비상등을 켜고 10초간 멍을 때린 뒤, 주차구역에 차를 세우고 내가 긁은 차로 다가갔다.
p.m. 8:19
투싼 차량 앞 범퍼가 긁혀서 페인트가 떨어져 나갔고, 운전석 문에 스크래치를 낸 것을 확인했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지는 거지? 하고 화가 났지만, 우선 해당 차량의 차주 분께 연락을 드렸다.
"확인해보고 내일 연락드릴게요 별 일 아니면 그냥 넘어가겠습니다"라고 너그러운 답변을 얻었으나, 내가 볼 때는 별 일이 아니었다. 문자로 죄송하다고 연락을 드렸고, 발급받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명함을 첨부했다.
집으로 돌아와 차량 도색 비용을 알아봤다. 5%가 오르면 주식을 팔아버리는 나의 소녀식 매매로 번 돈이 고스란히 수리비용으로 견적화되어있다. 이래서 주식은 제로섬 게임이라고들 하던가.
+4 days
4일이 지난 뒤, 차주 분께 연락이 왔다. 그냥 넘어가겠다고. 너무나 감사했고, 위안이 되었다. 새로운 직장에서 조금 방황하고 있는 시기에 그나마 좋은 일이 생겼다고 느꼈다.
요즘엔 '그냥 넘어간다'는 관용이 '호구'처럼 보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손익을 따지고, 타인이 나에게 입힌 피해에 대해 최대한 따져 묻는 것이 '똑똑함'처럼 보이는 시대에 이러한 관용에 대해 나 또한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질문했다. 쉽사리 하지는 못할 것 같다. 지 혼자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20만 원 받을 거 18만 원 받는다며 관용이랍시고 자위하겠지.
이 일이 있고 난 뒤엔 이러한 일이 나에게 생기더라도 한 번쯤은 관용을 베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관용이 내가 당하더라도 한 번쯤은 관용을 베풀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 추후 나도 이러한 관용을 베풀고자 한다. 관용의 전이효과가 많아져 관용이 '호구'가 아닌 '너그러움'으로 변환시키는 데 한 몫하고자 한다.
내일은 차주 분께 기프티콘을 보내고자 한다. 집에 들어가며, 아이스크림 케이크라도 사서 들어갈 수 있도록. 관용의 대가가 아닌, 따뜻한 마음에 대한 대접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