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블리 산 백포도주 예찬

by 다나 김선자



쁘띠 샤블리(petit Chablis) 백포도주를 마시면서 화를 품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연한 속살이 꽉 찬 봄날의 아스뻬흐쥬(asperge, 아스파라거스, 채소 이름)를 씹으며 무겁게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이성과 감성이 격렬히 충동하는 가운데서 산뜻한 공기가 간지럽게 파고들어 틈새를 벌여놓고 있었다.

그 역시 산들거리는 내 마음과 다를 바 없었는지 흐뭇한 미소를 잔뜩 머금고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태연히 그리고 부드러운 제스처로 넌저시 화애의 손을 내민다.

"자 건배하자, 음음, 이 포도주 너무 좋지 않니?"

"뭐지? 화해하자는 뜻?"

나는 여전히 뽀로퉁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 그만하자, 이 좋은 음식들을 앞에 놓고 무거운 분위기를 지속한다는 건 너무 어리석은 짓이잖아"

나 또한 속으로는 그 말에 적극 공감을 하면서도 쓸데없이 강한 자존심은 쉽게 문을 활짝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길 바라고 기다렸기 때문에 다가온 기회를 내치기도 슬기롭지 못한 짓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물러서기도 아쉽다는 옹졸한 마음 따라 어쩔 수 없이 겨우 동의하는 것처럼 "좋아 화해해,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우선 듣고 싶어"라고 했다.

꾸미거나 거짓말을 잘 못하는 남편은 "솔직히 말해서는 난 미안한 게 없는데 정녕코 네가 듣기를 원하고 좋아한다면 그렇게 말해줄게"라고 오히려 융통성 없게 말한다.

"아니, 그런 건 나도 싫어, 당신이 진정으로 내 기분을 이해해서 알아주기를 원해."

그런 조건부 조율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알았어, 이해하도록 해 보지"

"좋아, 그럼 이제부터 평화다, 자, 건배!"

그러므로 '짱'하고 포도주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침침했던 분위기가 한순간 화기애애하게 바꿨다.

"어때, 이 포도주?

"음, 정말 맛있어, 사실 나도 칭찬하고 싶은 마음에 입이 간지러워 계속 화를 내고 있기가 힘들었어. 그러나 당신이 먼저 화해를 청해 주길 기다렸지"

"그럼, 당연히 이 맛있는 포도주와 식단을 앞에 두고서 무겁고 흐린 분위기로 있을 수야 없지, 이 좋은 기분을 즐기지 못한다면, 정말 멍청한 짓이잖아"


무슨 일이냐 하면 사연은 다음과 같다.

때마침 날이 개었다.

아무래도 고등어는 숯불에 구어야 제맛이지? 귀찮더라도 지핀 모닥불에 생선 기름이 지글지글 타서 불냄새나는 고등어 껍질과 부드러운 속살 맛을 제대로 느끼고 싶었다.

어제 사놓은 신선한 고등어를 숯불에 굽기로 아침나절에 결정했었다. 남편은 점심식사 때가 되어가는데도 불에 대한 지침이나 당부는커녕 어떠한 조짐조차 없이 작업실에서 내려오지를 않는다. 내가 직접 불을 지피기로 했다.

그 또한 마찬가지나 나 역시 현대문명의 편리함도 좋아하지만, 진화가 덜 되었는지 바깥에서 원시적으로 불 피우는 걸 좋아한다. 더구나 겨우내 실내에서 지겹도록 웅크려 지내다가 따스한 봄뜰에 나와 모닥불을 지펴 놓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노라면 마치 해방을 맞은 듯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쾌적한 공기 속에서 타 오르는 활기찬 불꽃을 보노라면 몸과 마음이 충만한 기운으로 꿈틀거린다. 봄날 앞다투어 피어나는 꽃들과 파릇한 새싹들의 싱그러움을 바라보면 새로운 기운이 솟아난다.

음, 오랫동안 몸에 배어 있는 장작불 냄새도 싫지 않다.

"나 불 지피러 간다"

"어 그래, 몇 시지?" 그때사 남편은 반응을 보인다.


며칠간 내린 비로 나무가 습기를 품었지만 살금살금 내린 탓에 고목 숲 아래 마른 가지만을 추려 모아도 고등어 구을 정도로는 충분했다. 그러나 급한 마음에 쏘시개 감도 잔가지도 넉넉하게 쌓지 않고 불을 붙었더니 신문지만 삼키고 곧바로 꺼져버린다.

뒤따라 나온 남편이 그 모습을 보면서 "띠띠뜨, 나무가 빈약해, 더 많은 나무를 포개어 충분히 기초 구성을 잘해야 불도 잘 붙어" 그러더니 바삐 움직여 나무를 끌어 모은다. 급기야는 잔가지를 수북이 들고 와서 내 자리를 낚아채듯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는다. 그리고는 그 속에 나무를 차곡차곡 재 구성해간다.

나는 그 모습을 멍청히 지켜보다가 속으로 '이게 뭐야, 시작은 내가 했는데, 금세 내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얄미운 마음에 "흥, 나도 그 정도는 알거든, 하지만 불을 얼른 붙이고 싶은 마음에서 좀 서둘렀을 뿐이지" 비록 서툴지언정 인정하기는 싫었다.

사실은 불이 붙는 대로 나무를 더 들고 와서 올리려고도 했었다. 빨리 가나 느리게 하나 이렇게 하나 저렇게 가나 불을 때기만 하면 된다고도 생각했다. 속도보다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습기 먹은 나무에다 의욕과 욕망이 앞선 나머지 미숙한 시작이 되었었다.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기 때문에 할 말은 없지만 그냥 있기에도 자존심이 상했다. 그의 잘난 체하는 행동이 불쾌해서 원망스럽기도 못마땅하게도 여겨졌다. 또한 그가 붙인 불이 활활 타 오르는 모습을 보자 순간 질투심에 화가 더 났다. 그래서 관중으로 남기도 싫었다.

그리고 앵돌아서며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여기 있을 필요도 없네, 당신이 알아서 다해, 난 그만 들어갈래"

"그래, 추운데 그만 들어가" 내 자리를 가로챈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친절하게 오직 나를 위한 것처럼 하는 말이 위선적으로 들렸다.

그러므로 화가 났다. 그리고 토라졌다.

집안으로 들어온 나는 뚱하고 언짢은 상태로 상을 차렸다. 분주한 남편은 고등어를 구워서 갖다 놓고 어제 사 온 쁘띠 샤블리 백포도주 마개도 딴다.

"어떤 잔을 원해? 아무래도 다리 달린 포도주 잔을 좋아하겠지?"

"원하신 대로...?"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점심식사, 그런데 전식으로 먹는 아스뻬흐쥬(아스파라거스)가 예상과 기대 밖으로 너무나 맛있었다. 굵고 하얀 부드러운 풍염 한 속살은 심지가 거의 없고 은근히 맴도는 향미가 입안에서 활짝 핀 목련화처럼 환하게 퍼진다. 신선한 멜론 맛을 풍기기도 삶은 감자와 옥수수의 고소한 맛도 함께 느껴지면서 그 모든 풍미가 포함된 것 같았다.

그리고 쁘띠 샤블리 백포도주의 풍미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가게에서 시음해보지 못하는 관계로 염려 반 기대 반 세 종류의 샤블리 산 중 가장 저렴한 걸로 샀는데, 일전에 다른 까브에서 구입했던 샤블리에 비해 값 차이가 없는데도 맛은 월등히 좋았다. 가격 대비 뜻밖의 수확이다.

마시기 전 코끝에 잔을 살짝 갖다 대어 향기를 맡았때부터 샤블리 산 특유의 젖은 부싯돌에서 나는 상큼함으로 풍미를 돋우더니 마실 때나 마신 후에도 전혀 손색없이 일품이었다. 하물며 쁘띠 샤블리도 이 정도인데, 다음 단계는 어떤 맛일지 몹시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번에는 한 단계를 높여서 이 집 까브의 프리미에 크뤼(premier cru) 그리고 그랑 크뤼(grand cru)까지 마셔보자고 했다.

"알자스 산도 상세르 산도 좋지만 백포도주는 역시 샤블리 산이 최고야" 아낌없는 남편의 샤블리 백포도주 예찬!

여기서 그가 백포도주 중 제일로 꼽는 샤블리에 대한 그의 오래된 추억을 대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시절 어느 날, 친구 쟝-자크와 함께 자동차를 몰고 남쪽으로 가던 중 샤블리 근방을 지나게 되었단다. '샤블리가 멀지 않으니 우리 들렀다가 가자'고 그들은 별안간 뜻을 모아 어느 포도주 농장을 방문했다. 그때는 오늘날처럼 경제적 이익을 따지지 않던 시절이라 어렵지 않게 포도주 농장을 방문하기도, 손님을 쉽게 맞이하기도 했었다. 그들은 거기서 백포도주 샤브리를 한잔씩 차례대로 시음했단다. 그리고 되돌아 달리던 길 위에서 신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샘처럼 수없이 팡팡 쏟아져 나왔단다. 활발히 움직이던 뇌 세포들은 마치 생명수를 마신듯한 느낌으로 그 고조된 황홀함과 살아있다는 생기 찬 기분. 따라서 그때 마신 싱그러운 백포도주 맛은 이루 말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그 기분을 아직까지도 결코 잊을 수가 없단다. 그는 그때부터 샤블리 산 백포도주 매력에 빠져버렸음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백 포도주 하면 역시 샤블리를 으뜸으로 친다.

실제 시중에서도 백포도주 가운데 샤블리 산을 최고의 품질로 인정하며 고가품이다. 한정된 공간에 예민한 재배방식 등으로 이를 데 없이 좋은 독특한 맛은 물론 그에 비해 수효가 극히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처럼 소박하나 맛과 질이 풍부한 식단은 건강뿐 아니라 모든 감각을 아낌없이 기분 좋게 일깨워 준다. 요즘같이 폐쇄되어 고립된 생활에 소소한 기쁨과 즐거움의 순간이라고 할까. 풍미 나는 음식과 샤블리 덕분에 엉켰던 내 감정도 녹아들었고 우리에게 화해와 평화의 기쁨까지 주었다. 식탁에 앉아있는 동안은 풍성한 대화로써 서로의 뜻을 맞추고 정다운 기운이 넘쳐나게도 했다. 비록 일상의 한 끼 식사지만 특별한 날을 만들어 주었다. 맛 좋은 쁘띠 샤블리 백포도주가 있었기에 소소하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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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샤블리 마을 / 오른쪽 : 프랑스 지도에서 본 샤블리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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