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어떤 경우의 죽음에도, 어느 누구의 죽음도 슬프지 아니하고, 안타깝지 아니하며, 가슴 아프지 않을 수는 없다. 단지, 어떠한 상황이나 정도의 차이에서 나타내는 표현이 다를 뿐. 비록 96세의 호상일지언정.
시아버지의 죽음.
푸르른 하늘 아래 만발한 꽃들이 춤추고, 생명을 잉태하는 화창한 봄날에 영원한 이별을 알린다.
장례식!
그러나 삶이 영위되는 남은 자들을 위하여 조용한 축제의 장터가 되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96년 전 꽃피는 사월에 태어나 2022년 꽃피는 삼월에 아주 조용히 그리고 평온하게 떠나셨다.
영안실, 가족들만 조촐히 모인 빈소에서 고별인사를 나누고, 그가 세례를 받았던 바질릭 성당으로 가서 조문객들이 모인 가운데 애도 미사를 드린다. 그들과도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가족과 여러 친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발인하여 생-드니 묘지에 안치된다. 그곳에 영원히 잠들 것이다.
어두운 색상으로 단정하게 차려입고 영안실을 찾았다.
한산하다. 나는 빈소 앞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에는 뚜껑이 열린 멋진 참나무 관이 놓여있고, 옆에 세우진 관 뚜껑에는 십자가와 그의 탄생 및 사망연도를 알리는 1926-2022이라는 숫자가 금색으로 박혀 있다. 시아버지 삐에르는 좀 끼는 듯한 공간이지만 그 관 속 깔아놓은 비단천 위에서 너무나 평온하게 누워 계셨다. 평소의 모습처럼 양쪽 입꼬리를 살짝 추켜올린 커다란 미소, 그리고 조용히 꼭 다문 입, 지그시 감은 두 눈, 두 손은 배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옅은 줄무늬 검정 양복에 하얀 셔츠, 검정 줄무늬가 섞인 노란색 넥타이 차림은 그의 성향처럼 온화하고 반듯하다. 따뜻하고 은은한 떡갈나무 관 색깔의 톤과 일치하여 참 잘 어울린다.
얼굴과 손에는 분을 발랐는지, 성형이라도 했는지, 평소의 잡티가 거의 사라진 상태로 참으로 고왔다. 돌아가시기 전 보다 더 젊고 해맑은 모습이다. 장례 전문 담당자의 노련한 솜씨 덕분에, 그에게서 죽은 사람의 모습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약간 왜소해진 몸집과 큰 키가 조금 줄어든 느낌뿐. 편안하고 온화한 분위기다. 그 옆에서 분홍 장미 꽃다발이 화사하게 미소 짓는다. 너무나 평온하다.
시어머니, 시아버지의 얼굴을 더듬으며 "삐에르, 삐에르" 조용하게 불러 보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당연하다. 그리고는 "너무 차다. 삐에르, 온몸이 왜 이리 차가워?" 하며 혼잣말처럼 내뱉으신다. 애처롭기는 하나 비통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담담히, 현명하게 현실에 순응하신다.
애잔하지만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다.
우리도 차례대로 그의 손등에 우리 손을 얹으며 "오흐보와, 아듀!(au revoir, adieu!, 안녕, 잘 가세요!)"라고 말했다. 정말로 그의 손이 매우 찼다.
그리고 나는 시어머니께 "시아버지 아주 고우시다. 크게 미소 짓고 계신다.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라고 전했다.
"정말이니? 그렇게 보이니?" 하고 되물으시며 흡족해하신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시부모님 두 분은 배우자의 연을 맺은 후 7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동고동락, 금실지락을 함께 누려 오셨다. 이제 막 서로가 고별의 시간을 맞은 것이다. 섭리대로.
모두가 한결같이 말한다. 쎄 라 비!(c'est la vie!, 이게 인생이다!)
그 누구도 가는 길을 막지 못한다.
시아버지, 비록 호화롭고 화려한 삶은 아닐지언정 넉넉하고 편안한 인생을 즐기시다 죽음 또한 큰 고통 없이 조용히 부드럽게 떠나셨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죽음, 노환의 잠든 상태로.
모두에게 행운이었다.
참나무로 곱게 만든 관이 조용히 경건하게 봉합되어 닫혔다. 이 모든 절차는 고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손작업으로 차분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시신이 든 관은 영구차에 실리고 그 뒤를 따라 우리도 생-드니 바질릭크 성당으로 향했다.
마침 노 시장이 열리는 날이다. 바질릭크 광장에는 초봄의 화사한 날씨와 함께 수많은 인파들로 붐볐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레스토랑 햇살 가득한 테라스마다 여유로운 사람들 모습으로 활기차다. 음침한 겨울에 방문했던 거와는 분위기가 천지차이다. 프랑스에서 이민자가 많기로 손꼽히는 동네답지 않았다. 적어도 이날, 지금의 분위기만큼은. 우리는 먼저 온 친구 부부를 만나 인사를 하고 예약해 둔 옆 식당으로 갔다. 아쉽게도 같은 식당은 아니다.
음식 맛도 분위기도 좋았다.
시댁 가족들의 고향, 그들은 추억으로 시간을 낚는다.
바질릭 성당, 미리 온 친지들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코로나19와 이런저런 이유로 참으로 오랜만의 만남이다. 그중 내가 처음 보는 친지도 있다.
깔끔하게 단장된 바질릭 성당은 밝게 비춘 햇살 덕분에 더더욱 아름답다. 안으로 들어서니 마치 천상에서 오색 꽃잎들이 떨어지는 듯했다. 빛을 받은 둥근 장미 창문 비트로에서 화사하게 꽃들이 피어나고도 있다.
내 곁에서 함께 걷던 라파엘이 말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여기 왔던 게 몇 년 전 올리비에(Olivier de Berranger) 장례 미사였었어"
올리비에는 바질릭 성당에서 주교로 계시다 영면하신, 라파엘과 내 남편의 스승 프랑소와 사촌이며, 17년간 한국에서 살았던 오영진 주교다.
라파엘이 덧붙인다. "집에는 그가 한국에 관해서 쓴 책이 있으니 다음에 보여 줄게"
조문객으로 오신 친지들은 많지가 않다. 혼잡하지 않아서인지 더욱 두텁다. 사실 시댁은 가족 자체가 많지 않을뿐더러, 친구분들 중 이승을 떠나는 마지막 여행자가 되신 시아버지, 그를 배웅할 친구분은 없다. 그러나 외롭지 않을 만큼은 충분했다. 이 또한 검소하신 시아버지 평소 철학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태어나 이제 그 곁에서 영원히 잠들 것'이라는 신부님의 설교 하에 애도 미사가 시작되었고, 우리들은 고인에게 예의를 갖춘다. 모두가 차례차례 관 위에다 손을 올려 작별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성당을 빠져나와 큰길 건너 묘지까지 걸었다.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으며, 수다가 빠지지 않는다. 산책이라도 나온듯한 분위기다.
생-드니 묘지 입구에 도착해서는 고인을 모신 관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그 뒤를 따라 50미터 남짓한 장지까지 동반했다. 그리고 고인은 우리가 지켜보는 앞에서 편안히 가족묘에 안장되셨다.
그는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셨다. 이승의 희로애락을 벗 삼아 지내시다가. 가볍게 가셨다.
장례식은 화려하거나 장엄하지는 않았지만 경건하고 아름다웠다.
어느 누구도 무겁고 침통한 비애 같은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다. 격식에 맞춰 엄숙하게 경의를 표하며, 고인께 '아듀, 오흐보와!(안녕, 잘 가세요!)' 마음속으로 그의 떠나는 길을 배웅하며 명복을 빌었다.
삼월의 날씨는 여전히 싱그럽다. 축제 같은 하루 그 역시 시아버지, 삐에르 떠나시는 길에 한량없게도 친절함을 베풀어 주었다. 그 덕분에 우리들도 끝없는 회포를 풀어내고 소식을 주고받으며 슬퍼할 틈조차 없었다. 새삼 돈독한 정을 다시금 확인하기도, 나누기도, 끊겼던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또다시 기약한다. 남은 자들의 몫으로.
모두에게, 모든 것에 감사함을 표하면서.
죽음은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다. 누구나 죽는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