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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나 김선자 Mar 18. 2022

파리의 봄

앤서니 카로 조각전과 에밀리 회화전



어느 날 아침부터 창문을 열면서 봄을 느낀다. 공기도 냄새도 다르다. 긴긴 겨울 동안 멈췄던 새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어찌 그리도 잘 아는지, 봄이 왔음을. 참으로 요란하게 지져댄다.


꼭 봐야 할, 놓치고 싶지 않은 두 전시가 있어 한꺼번에 볼 생각으로 파리 시내를 나갔다.

조각가 앤서니 카로(Anthony Caro, 1924-2013) 전과 오스트리아 작가 에밀리(Emily Kame Kngwarreye, 1910-1996) 회화전이다. 먼저 맑고 또렷한 정신일 때 집중해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조각가 카로 전시부터 보기로 했다.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신선한 에너지와 함께 자극제 역할을 하며 좋은 영감도 준다.

파리 보부르 길, 갤러리 땅쁠롱(Galerie Templon)에서 일, 이년에 한 번꼴로 벌써 몇 번째 전시가 열리고 있지만, 그때마다 놓치지 않고 보았다. 항상 같은 작품도 아니다.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만큼 파리가 아닌 어디서라도 가능한 반드시 챙겨보려고 한다.

오랜만에 건물 안마당에 있는 갤러리를 찾았다. 커다란 창을 달아 입구가 더 밝고 열린 느낌을 준다.


조각품은 1970년대부터 2012년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의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었다. 그중 가공되지 않은 강철판으로 구성된, 우리가 선호하는 70, 80년대의 추상 조각품도 포함되었다.

그리나 이제껏 보아온 작품과는 예외적인 반 구상적 스테인드 스틸 작품에서는 특별한 감흥을 받지 못했다. 처음 보는 조각품이다.


작가들의 부류에는 작업 방식이나 형태, 추구하는 과정과 방향, 비전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뉜다. 카로를 비롯해 피카소, 클로드 비알라 등은 다양한 시도를 끊임없이 함으로써 수많은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다. 그러므로 모든 작품이 최상의 완벽한 작품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 가운데 훌륭한 작품도, 그렇지 못한 작품들도 간혹 있기 마련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향을 가진 작가들도 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르다 말할 수도, 그런 취지나 뜻도 아니다.

단지 조각가 앤서니 카로는 죽기 직전까지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하며, 량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엄청난 작품을 실현했던 훌륭한 작가다. 따라서 경이로울 만큼 충만한 에너지를 가진 소유자라 아니할 수 없으며, 그의 작업에 존경과 감탄을 금치 못할 뿐이다.

이 위대한 조각가는 차후에 추가로 좀 더 자세히 적어보기로 하겠다.





맞은편 우리가 믿고 가는 또 다른 갤러리에서 젊은 작가의 작품을 보고 또 다른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지난번 로슈에서 맛있게 먹었던 샌드위치와 쉬농 산 포도주의 기억을 회상하며 예전 우리가 단골처럼 드나들던 브라스리 미스트랄로 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른다.

센 강가에 있는 이 카페, 브라스리는 맞은편 꽁시에르쥬가 있고, 먼 대각선으로 에펠탑이 보인다. 옆 건물은 벌써 몇 년째 공사 중인 떼아트르 들 라 빌(Théâtre de la Ville), 한 시절 우리가 정기권을 예약해 놓고 현대무용을 즐겨 관람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때 언제나 미리 가서 조촐한 저녁으로 버터 바른 잠봉 샌드위치에 샨세르 산 백포도주 한잔을 마시고 공연장으로 향했었다. 그 낭만을 잃은 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아직도 공사는 진행 중이다.

모처럼 들어간 미스트랄은 그동안 주인도 바꿨고, 예전의 그 감흥은 아쉽게도 사라졌다. 하지만, 위치가 좋아 여전히 관광객을 비롯해, 우연히 지나다 또는 우리처럼 잊지 않고 찾는 손님들로 붐빈다.

우리는 에펠탑과 꽁시에르쥬, 센강이 모두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로슈의 추억도 함께 덧붙여 버터 바른 잠봉 샌드위치와 적포도주 한잔씩을 시켜 먹었다. 로슈의 맛에 견줄 수야 없지만 그 못지않게 오늘의 분위기와 더불어 흡족했다. 피와 살이 되고, 뼈와 근육이 되는 영혼의 샘물을 이미 충분히 마시고 오는 중이기 때문에. 좋은 작품으로.


파리, 활기 넘치는 토요일 오후, 이 분위기가 내 낭만적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내 은밀한 마음까지 털렸다. 아마 좋은 작품을 본 만족감과 행복, 자극제와 위안, 감동 그리고 해소된 긴장감, 이 여유로움에서 빚은 낸 결과가 나를 감상에 빠져들게 했던 것이다. 내면의 부조화된 갈등과 충돌하던 그동안의 하소연. 나는 포도주잔을 들면서 마침내 꾹꾹 눌러두었던 속마음을 꺼내 놓았다.

"왜 나는 자신의 작품에 만족이 안될까? 아직도 헤매고 있다는 기분이다. 이런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진다. 스스로에게 신뢰가 부족한 것일까? 왜?"

"당연하고 다행한 일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모네 역시도 그랬다. <불만족은 하나의 큰 원동력이다>"

모네가 했던 말이라며 남편이 그대로 옮겨준다.

그렇다.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함은 작업의 동기가 되는 모터가 아직 살아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안주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작가라면 이미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며, 한두 번, 아니 수시로 충돌하면서 고민하고, 자문하며, 되새기는 문제일 것이다. 또는 가끔씩 감성에 젖어 고뇌하며 매너리즘적 고독에도 빠질 것이다.

요 며칠간 내가 그랬었다. 그러므로 그 쌓였던 의문의 스트레스가 방금 막 터져 나온 것이다.

물론 잘 알고는 있었지만, 남편의 그 한마디가 무한한 위안을 준다. 비로소 한 모금의 포도주와 함께 눈물을 마신다. 슬픔이 아닌 기쁨의, 안도의 눈물, 또한 해소의 샘물이다.

용기를 얻어 이미 터진 봇물을 다시 이어간다. 털어내어야만 했다. 비우야만 했다. 그는 나의 유일한 해우소!

"과연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옳은 방향일까? 가치가 있을까? 왜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매달리는가? 왜 똑같은 작업에는 지겨움을 느끼며 만족할 수가 없는가? 왜 길이 없는 곳으로만 향할까? 보이지 않는 길을 찾는 이유는? 솔직히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 참으로 어렵다. 왜? 왜? 왜?"

남편은 말한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갈망하는, 호기심 그 자체가 창작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하나의 원동력이다. 이것이 없으면 예술가로서의 삶, 생명은 끝난 것이다."

우리는 서로 위안을 주고받는다. 얻고 나눈다. 다시금 내 길을, 내 가치를 확인하고 증명한다. 확고한 결의 또한 가진다. 털고 나니 후련하다. 그리고 비장한 각오로 되살아난다. 새로운 도약을 느끼면서 행복하다.

거기에는 작업의 동료로서 남편이 있다. 좋은 작품과 전시, 훌륭한 작가들이 있다. 생기 넘친 젊음이 가득 찬, 아름다운 도시, 예술의 도시, 자유로운 파리의 봄날이 있다.





미스트랄을 등지고 센 강가를 사뿐히 걸었다. 상쾌한 리듬에 살랑거리는 발걸음들, 인파. 저 수많은 창문에 갇혔던 파리지앵들이 푸른 하늘을 맞이하러 한꺼번에 뛰쳐나왔다. 코로나도 두렵지 않다. 마스크도 필요 없다. 길가의 재즈 연주자들 곁에서 귀를 쫑긋 세워본다. 엉덩이를 잠시 난간에 걸쳐도 본다. 강물을 헤치며 나아가는 청둥오리의 꽁무니를 쫓아 고개를 내밀어 눈부신 햇살을 받는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여 엘리제궁 근처 공원에 닿았다. 벤치에서 마지막 호흡을 가누고 다시금 갤러리 가고시안으로 갔다.

오스트리아 원주민 애보리진 출신 애밀리 작가의 사막 회화가 전시되고 있다. 자연과 우주를 표현했던 애보리진 전통 회화 기법인 점과 선. 조상들의 정신적 전통의례 관련된 신체 회화처럼, 몸과 대지의 활기찬 에너지를, 동물과 식물의 삶, 조상들 이야기와 노래 등을 수직과 수평의 줄무늬와 점을 이용하여 캔버스 위에 붓으로 그렸다. 작가의 언어로 표현한 현대 회화다.

여기에 전시된 작품들 중에서 아쉽게도 한두 점을 제외하고는 약간 실망스러웠다. 내 마음을 잡아끌게 하는 뭔가가 없다. 반복적 겹치기 방식은 체계적이고 의도적인 느낌이 들어 안타까웠다. 색상 또한 화면상에서 보는 거와 다르게 둔화하고 우중충한 느낌도 들었다. 무겁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작가가 생을 마감하기 전 8년 동안에 그린 그림은 무려 하루 한 점씩 완성했을 정도 엄청난 수효란다. 필요 불가결한 사항은 아닐지언정, 그 열정과 집념에 경의와 존경을 표하며, 그 비상한 에너지가 마냥 부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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