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또한 축복 같은 햇살이 찾아왔다.
떠나기 전, 일기예보에 맞춰 날짜를 정하긴 했으나, 새삼스레 행운의 선물 같아 기쁘다.
아침 식사를 느긋이 끝내고 숙소에서 걸어 10여분 거리의 뚜르 시립 미술관으로 갔다.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 작품이 있다 하여 잔뜩 기대를 걸고 도착했다.
미술관 안뜰 중앙에 이백 년 된 거대한 레바논산 전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울창하게 뻗어 이 넓은 공간을 독차지하며 서 있다. 장관이다.
1, 2층으로 된 미술관에는 수많은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지만, 명화는 손꼽힐 정도다. 푸생 작품도 없고, 푸생의 아뜰리에 작가 작품이란다. 지금은 그마저도 전시장에 없었다. 그러나 모네의 작품을 보았다.
미술관 앞 거리는 골동품 가게가 많다. 오다가 점찍어 둔 물건 하나를 안에 들어가서 보고 싶었지만 문이 닫혔다. 뚜르 시내의 상점들은 파리와 다르게 점심시간에는 거의 모두 문을 닫는다. 옛 방식 그대로다.
우리는 맛집이라는 캄보디아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내친김에 르와르의 또 다른 대표적인 성을 찾아 나섰다.
이번에는 뚜르 서쪽 방향으로 달렸다. 우세성을 가던 도중, 뜻밖에도 빌랑드리 성(Château de Villandry)을 만났다. 잠시 차를 세우고 성 밖에서 그 규모와 양식 그리고 주변 환경을 살펴보았다. 정원이 유명하다지만 아직 좋은 계절은 아니다.
다시 뚜르에서 33km 떨어진 우세성(Château d'Ussé)에 도착. 이곳은 브라까스 공작 7세(7e Duc de Blacas)의 성으로, 중세와 르네상스 스타일이 혼합된, 변형과 증축의 흔적이 뚜렷한 건축물이다. 아름다운 지세를 끼고 펼친 날개처럼 늠름한 구조가 돋보이는 잘 보존된 멋진 성이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랑제 성(Château de Langeais)을 찾았다. 마을 중앙에 웅장한 요새로 우뚝 자리 잡고 선, 15세기 중반 풍성하게 새겨진, 르와르 계곡의 또 하나 중심적인 왕실 성이다.
인상적인 것은 적의 방어를 위해 들고 내리는 식의 성문이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다리가 되어 출입도 가능하지만, 닫힐 경우 완전한 요새다.
이곳에는 샤를 8세와 안느 드 브르타느(Charles VIII et Anne de Bretagne)의 역사적인 결혼식 장면이 재 연출된 방과 타피스리가 유명하다.
이 모두가 르와르 강을 따라 화려했던 옛 시절을 간직한 역사적 발자취로써, 그 웅장함과 함께 고풍스러운 작은 마을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따라서 나들이 겸 한 번쯤 가볍게 둘러볼만한 곳이다.
여행의 마지막 날, 불유쾌했던 사건 하나를 여기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려고 한다.
아파트 체크아웃은 12시. 천천히 정리 후 출발해도 뚜르에서 60km,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역사 깊은 소도시 로슈(Loches)에 도착할 것이다. 거기서 점심을 먹고, 로슈 성을 방문한 후 집으로 돌아간다는 일정. 그러면 하루를 무의미하게 소모하지도 않을뿐더러, 정도껏 파리 외곽 순환도로의 퇴근시간 정체도 피할 수 있다는 계산. 금상첨화, 이토록 실속으로 꽉 찬 하루를 보낼 수 있을 멋진 생각이었다.
출발은 순조롭고 좋았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남쪽을 향해 달렸다.
로슈는 뚜르에서 시계방향 25분을 가리키는 남동쪽 지점에 있다. 그러므로 굳이 유로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선택했다. '여행의 맛은 국도가 제대로 인 거지!'라고 확고부동하게도 생각했다.
드디어 뚜르 시내를 벗어나서, 고속도로 진입 전 국도를 타고 빠져나왔다. 아주 잘했다고 자신만만, 그런데 불가 몇 분 지나지 않아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국도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부터 헤매기 시작, 아무리 돌고 돌아도 길이 없다. 아니 길이 너무 많다. 오직 우리 갈길이 보이지 않을 뿐.
오른쪽을 돌았다 왼쪽을 꺾었다가 직진하다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 자동차를 세워 지도를 펼쳐보고 덮기를 몇 차례, 가도 가도 똑같은 집, 또 같은 길, 드디어 방향감각마저 마비되었다. 그렇게 몇십 분이 흘렀다. 결국 제자리걸음. 물어볼 사람도 없다. 너무나 조용하다. 우리가 들어선 곳은 뚜르의 외곽 주택가, 이 미로 같은 길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도무지 오리무중. 점점 기가 찬다. 열이 조금씩 차오르더니 목덜미까지 올랐다. 엉덩이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왜 국도 방향 표지판이 없는가? 신도심 도로망의 낭패와 관료적인 행정에 비난을 쏟아놓기도, 누구랄 것 없이 편리성만 쫒는 이들에게 원망도 했다. 한 시간 가까이를 길 위에서 넋 나간 꼴로 뱅글뱅글 돌았다.
비록 자랑거리 정도는 못될지언정, 남편의 운전 실력은 물론 지리적 방향 감각은 남다르다. 적어도 여태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으며, 진실이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헤맨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번만은 분명 예외다. 처음 겪는 일이라 더 어리둥절했다.
우리에게는 내비게이션이 없다.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귀에 거슬리는 소음으로만 들렸다. '내비게이션은 남편의 머릿속에 있다'며 종종 농담도 했었다. 그러므로 권유 종목에서 제외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마트폰이라도 있다면, 앱을 깔아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없다. 우리는 디지털 문명과 다소 거리를 두고 산다. 물론 완전히 배제까지는 아니다. 단지 필요 불가결한 것은 마다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쫓지도 않는다. 종이지도를 펼쳐 들고 찾는 것을 더 좋아할 뿐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내비게이션 도움이 필요 불가결함을 시사한 격이다.
사회 구조도 변하고, 우리의 지각 능력 또한 차츰 저하됨을 인식하는 계기였다.
신형 주택가는 바둑판처럼 반듯하고 단순하여 길도 동네도 넓고 깨끗한 반면 특징이 없다. 성당과 시청 광장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옛 동네와는 다르다. 초행길일 경우 기획된 현대식 주택 단지 속으로 들어가면 이처럼 미로 같아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또한 오늘날 대부분의 자동차에 내비게이션 장착은 물론, 스마트폰 사용이 보편화되어 길 찾기에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같은 사람도 있지 않은가? 소수인의 문제라고만 할 것인가? 아니면 각자가 스스로 해결해라는 뜻인가?
긴급한 생리적 문제도 처리할 겸, 상업지구로 들어갔다. 역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행인에게 길을 묻고 보니 방금 우리가 지나온 길이다. 어이없게도 코앞에 두고 지나친 것이다. 조급함에서는 해결은커녕, 단순한 것조차 어렵고 더 꼬이는 법. 무엇이던 모를 때 더 복잡하고 어렵다.
로슈(Loches)에 도착. 아니나 다를까 점심때가 훨씬 넘어 있었다. 중앙의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서둘러 레스토랑을 찾았다. 이런 소도시에는 식당이 많지도 않지만 하루 종일 영업하지 않는다. 더구나 관광철도 아니다.
고성 가는 길을 들어서니 아담하고 예쁜 옛날 마을이 나온다. 이 와중에도 순간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레스토랑, 브라스리(카페 겸 식당) 모두 점심식사 영업은 마친 상태다. 케밥(터키 샌드위치) 가게마저 끝났다. 어쩔 수 없다. 문 열린 제과제빵집에서 까망베르(치즈 이름) 샌드위치와 잠봉(돼지 허벅지 훈제)을 끼운 버터 바른 샌드위치, 그리고 후식으로 초콜릿 빵과 건포도 빵을 샀다. 그리고서는 방금 방문했던 브라스리에 들어가서 샌드위치를 꺼내 먹어도 되는지 물었다. 여주인은 흔쾌히 승낙을 했다. 아주 매력적이면서도 친절하다.
우리는 바깥과 접한 창가 아주 편안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남편은 쉬농산 적포도주 한잔, 나는 커피 한잔을 시켰다. 샌드위치뿐만 아니라 뜻밖에 포도주 맛이 기차게 좋았다. 커피맛도 훌륭하다.
남편은 추가로 적포도주 한잔과 커피, 나도 덩달아 같은 적포도주 한잔을 시켜 마셨다.
샌드위치와 포도주, 이 얼마나 환상적인 조합이며, 조화인가! 더구나 값도 싸지 않은가!
이 천상의 맛, "시장이 반찬이다" 정도로 표현되지 않는, 예상 밖의 풍미다.
어지간한 레스토랑의 음식보다 더욱더 훌륭한 한 끼였다.
분위기 또한 최고다. 조용하고, 안팎이 연결된 듯 고립되지 않은, 정취와 낭만이 있다. 분명 이 맛에는 여주인의 친절과 매력이 한몫을 더 했으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이 소박하지만 알찬 식사 덕분에 방금 전까지의 불쾌감과 스트레스가 손님의 담배연기처럼 공기 속으로 몽땅 사라지고 있었다.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고성까지 걸었다. 이 아름다운 명소, 감성과 낭만, 서정적인 운치가 흐르는, 옛 골목길을 천천히 걷는 기분도 좋다. 성 입구에 있는 로마 양식의 성당, 13, 15세기 샤를 V, VI, VII에 이르기까지 왕과 왕비의 거처로써 건축된 로슈 왕실 성, 그리고 11세기 때 지은 거대하고 견고한 요새(donjon), 이 모두가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이 요새는 천연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에서도 손꼽히게 잘 보존된 돌로 지은 11세기 로마 건축물이다. 그 특징으로써 창문이 크지도 많지도 않아 삭막하며 삼엄한 분위기와 함께 거대하고 견고하여 마치 성의 엄중한 요새답다. 이 숙명적인 모순으로써 15세기에 이르러 루이 11세부터 1926년까지 그 용도가 감옥으로 바뀌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완고한 감옥보다 더 냉엄한 고립감을 충분히 느끼게도 했다.
Donjon(요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