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ton에서 여름 바캉스를...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벌써 금요일이다. 오늘에 사 비로소 일상으로 돌아온 듯하다.
집을 떠난 지는 지난 화요일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침에 집을 나서면 10시간 남짓을 큰 쉼 없이 달려서 하루 안에 도착하여 다음날이면 거뜬히 바닷가를 걷기도 물에 뛰어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몸은 빠르게 지치고 회복 속도는 느리다. 나이가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이제부터 마라톤식 운전은 그만두고 길 위에서 하룻밤을 묶기로 했다. 어차피 여행인지라 조금 돌아서 낯선 지방을 둘러보며 천천히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우리는 망통행 직진 고속도로를 두고 돌고 돌는 오드-잘프(Hautes-Alpes) 주를 거쳐서 왔다. 프랑스에 산 지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 한 번도 내 발길이 닿지 않은 곳, 오드-잘프 산골 마을. 기암괴석, 첩첩 산을 구불구불 넘는 이름하니 나폴레옹 길(route Napoléon)이다. 커다란 보리수나무와 해당화가 만발한 작은 마을들을 지나서 복숭아, 살구나무 재배 농장과 보랏빛 색종이를 오려 붙여놓은 듯한 라벤드 밭도 지났다.
알프스의 노정에는 나폴레옹에 대한 흔적이 많다. 그의 흔적이 어디 여기뿐이겠는가? 나폴레옹이 사만 군대를 이끌고 넘었던 알프스의 그랑 생-베르나르 고개(col du grand St-Bernard), 그 높은 산을 넘어 이탈리아와 스위스로, 그리고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넘어오기도 했었지만, 그때마다 사보아(Savoie) 지방으로만 지나다녔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번 여정은 내게 프랑스의 또 다른 풍경을 그려 주던 좋은 경험이었다.
그런데 늦은 오후 나절에 마신 콜라 속 카페인 때문인지 고요하고 아늑한 정취가 넘쳐나는 이토록 호젓한 산골 호텔 방에서의 하룻밤은 불행히도 애절하게 울어대던 올빼미 소리를 들으며 뒤척이는 밤이 되었다. 보리수나무 꽃향기의 그윽한 애무에도, 창 너머 단풍나무 가지가 잔 바람에 살랑대며 들려주는 자장가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맞아 온통 녹색으로 뒤덮인 산골의 신선한 공기와. 까맣게 잘 내려진 진한 향내 나는 커피와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가 담긴 아메리카식 그리고 프랑스식의 크로와상과 버터와 잼을 바른 빵, 이 든든한 아침 식사 덕분에 우리는 다시 즐겁게 하루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늘을 드리우며 창가에 내려앉은 커다란 단풍나무가지가 우리의 출발에 손을 흔든다
망통(Menton)에 도착한 세 번째 날 마침내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조심스럽게 수영을 했다는 뜻이다. 수영이라고 말하기에는 거창할 정도의, 고작 가슴 높이에서 어설프게 헤엄을 쳤다. 왜냐하면 지쳤던 몸이 아직도 덜 깨어났고, 파도는 거센 반면, 방파제가 멀지 않아 바닷밑에는 위험하게도 큰 돌들이 많았다. 따라서 파도에 휩쓸려 자칫 돌에 부딪히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서다.
파도는 내 작은 몸을 거칠게 때리고 부서지더니 말없이 사그라진다. 나는 두세 번 쓰러지고 넘어지다가 겨우 네발로 기어서 물 밖으로 나온다. 그토록 조심을 했건만 남편의 엄지발가락이 날카로운 돌에 스쳐 피가 났다. 다행히도 아주 약소한 정도이나 번거롭게 여름 해변에서 매일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야 하는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에서 나오는 순간 젊음을 되찾는 기분. 이토록 상쾌할 수가 있을까! 활기찬 피부가 토닉 하다. 어깨가 쫙 펴짐과 동시에 마음은 이미 저 멀리 돛배 따라 유유히 항해한다. 길었던 여정의 피곤이 일순간 거친 파도에 몽땅 씻겨 나간 것이다. 바닷물은 정말로 신비로운 마법을 지녔다.
이것이야말로 여름 바캉스가 주는 진미이자 인생에 있어서 우리가 취하며, 누릴 수 있는 거대한 선물이다.
프랑스인들에게 여름 바캉스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들에게 바캉스는 인생에 있어서 삶의 일부분이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일 년 계획의 중심에는 바캉스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이들에게 또 다른 하나의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며, 거기서 사랑과 건강, 애정과 관능적 아름다움을 얻는다. 인간은 휴식 없이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없듯이, 건강한 내일의 질 좋은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서 바캉스가 있다. 이들은 여름 바캉스를 기다리며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하고, 다녀와서는 그것을 풀어놓으며 해의 나머지를 보낸다. 그리고는 새해를 맞으면서 다음 바캉스를 기다린다. 유월 중순이 접어들면 어디서든지 바캉스에 관한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온다. 직장은 물론 슈퍼마켓이나, 친구와의 식사 자리에서도 "언제 떠나?" "어디로 가?" 떠오르는 화제가 바캉스다. 지난번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갔더니 미용사가 내게 던진 말도 "바캉스는 어디로 가세요?"
이 기간 동안에는 프랑스 행정적 업무 일부가 일시적 정지되고 사람들은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며 관용을 베푼다. 이것은 오랫동안 이어온 이들의 관습이고 문화다. 백화점 및 상점의 여름세일 역시도 바캉스 직전에 일제히 시작된다.
프랑스의 여름 바캉스는 대략 6월 중순부터 10월 초순까지 순차적으로 이어진다. 당연 절정은 7월 초부터 8월 중, 후반경이다. 6월과 9월은 시즌을 피하여 정년퇴직자들이 먼저 또는 나중에 떠나고, 6월 하반기 접어들어 바칼로레아가 끝나는 시점, 학교들이 종강하면서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는다. 그리고 7월 14일 프랑스혁명 기념일을 기점으로 초절정에 닿으면서 도심을 빠져나간 차량들로 인해 전국의 고속도로가 정체를 이룬다. 그리고서 텅 빈 파리 시내는 외국 여행객들이 대신 메운다. 만약 7, 8월에 파리를 방문한다면 거리나 지하철에서 불어보다는 외국어를 더 자주 들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예상하는 여름 바캉스 기간은 보통 3주 정도, 경우에 따라 짧게는 10일, 길게 한 달, 또는 한 달 반 예정으로 떠난다. 이들은 도시보다 자연 속으로, 햇살을 따라 산과 계곡, 물을 찾아 바다로 떠난다. 그리하여 여름 남불은 바캉스객들로 한철을 맞이한다.
남불 코트다쥐르(Côte d'Azur)는 지리적 영향으로 날씨도 좋고 경치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풍성하다. 곳곳에 유서 깊은 유적지를 비롯해 풍성한 꽃들의 지방답게 향수 박물관도 유명하다. 특히나 20세기 많은 화가들이 빛을 찾아 코트다쥐르로 떠났으며, 그 흔적으로 인해 미술관도 많다. 마티스, 피카소, 샤갈, 레제, 르노와르 등. 물론 이곳은 프랑스에서도 단연코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 보석 같은 곳이다. 하늘을 치솟은 야자수 나무와 강렬한 태양에 조각된 각종 선인장, 레몬과 오렌지 나무들, 월계수 나무와 울타리를 타고 붉게 넘실대는 부깡빌리에 등등. 거기에는 응당 하늘색 바다와 기암절벽의 수많은 곶과 만이 형성된, 옥빛 해변이 있다. 코트다쥐르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프랑스 남동부 툴롱에서 앙티브, 니스, 칸, 모나코를 거쳐 망통 해안을 통틀어 일컫는, 바로 하늘빛 해안을 뜻한다.
나 역시도 망통에 박혀 수영만 하면서 지내지는 않았다. 니스의 마티스와 샤갈 미술관에서 명화를 감상하기도 방스에 마티스가 남긴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을 보러 방스 예배당에도 갔다, 샤갈이 살다가 묻힌 아름다운 마을 생-폴 드 방스(St-Paul de Vence)를 방문했고, 레제의 그림을 보려고 비오뜨(Biot)와 호데즈(Rodez)에 있는 술라주 미술관을 찾아가기도 했다. 따라서 내게 이 여름 바캉스가 주는 필요성은 매우 크다. 일상의 반복된 리듬을 깨고 나가는, 타인에 의해 고정되고 교육된 의식을 내려놓고, 탈피시키는, 비우는, 순수한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본능에 가까워지는 휴식의 시간이다. 또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대가들의 그림을 직접 보고 감상하는, 또한 영감을 얻어 맑은 에너지를 받아오는 기회이기도 하다. 일종의 강장제 역할을 하는 윤활유이고 원동력을 만드는 산 경험이다. 그래서 떠난다. 다른 세계의 공기를 마시고 신선한 새로운 것들을 눈에 담아 가슴과 정신을 채운다. 그럼으로써 작업실에서 오로지 거침없이 풀어놓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16일간 친구의 망통에 있는 바캉스 집을 빌렸다. 물론 완전 공짜는 아니다. 이 집은 시내 언덕 위 푸른 바다를 전망으로 꽃과 새들을 벗 삼아 정원에서 식사를 하고, 밤에는 별을 보며 사색보다 모기와 투쟁을 즐길 수 있는 공해와 소음에서도 용케 비껴 나 있는 도심 속 딴 세상이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한 공짜는 없듯이 이 비탈길을 오르기 위해서는 숨이 턱을 지나 정수리까지 차오르도록 발품을 팔아야 한다. 자동차 진입로는 없고, 자동차 엘러베이트와 당나귀가 왕래하던 옛 계단만이 있다. 이렇게 옛날 생활인처럼, 다리 근육 운동이라는 좋은 구실로 여기다가 나중에는 잔꾀가 생겨 절반의 수고를 덜어주던 자동차 엘러베이트를 타고 올랐었다. 그렇지만 억척같은 모기와는 도저히 타협이 어려웠다. 수영을 하고 집에 도착하면 온몸에 솟아난 땀은 물론, 그 냄새를 가장 먼저 반기는 모기들이다. 이들의 극성으로 인해 이 조용한 해변 도시에 와서 살까 했었던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망통은 그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지중해 연안도시에서도 유독 마이크로 아열대성 기후로 습도가 높다. 그래서 이 도시의 식물은 지중해 연안에서도 특이할 정도 다양성을 지닌다고 한다.
망통의 해변은 넓다. 작은 조약돌과 굵은 모래들이 햇볕에 부서져 은빛 소금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자유롭고도 평화로운 해변이다. 금요일 저녁 해변가에서는 음악 축제도 열린다.
우리는 한낮의 더위를 피해 햇살이 한풀 꺾일 즈음 매일같이 바다로 나간다. 파라솔을 꽂아놓고 곧바로 바다로 뛰어든다. 망통 도착 다섯째 날부터는 바다가 잔잔하여 병든 물개처럼 천천히 헤엄쳐 수영 한계선에 떠있는 노란 공까지 왕복을 한다. 가끔 한계선에 쳐 놓은 밧줄에 앉아 쉬면서 사람들의 수다를 듣기도, 또는 먼 백사장의 관중을 바라보며 서커스 자전거 페달 밟기도, 바다에 누워 하늘을 날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하루의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수영을 끝내면 젖은 발도 말릴 겸 우리는 카지노까지 맨발로 걷는다. 그리고서 남은 모래를 털어내고 반대편 구도심가 해변까지 아페로를 마시러 간다. 거기에 우리가 좋아하는 카페가 있다. 우연한 하루, 자유롭게 배치된 탁자와 어떤 분위기에 이끌러 들어갔다가 단골이 되었다. 거기 라이브 가수의 노래도 좋다. 먼저 우리는 안주삼아 이탈리아인이 파는 피자 한 조각을 사 들고 벤치에 앉아 맞은편 정박된 돛배들, 바다와 국경선 넘어 이탈리아와 해안 따라 펼쳐진 절벽, 이 아름다운 풍경을 음미하면서 먹는다. 그리고 카페로 간다. 이것이 우리가 취하는 바캉스의 사치이고 즐거움이다.
망통은 프랑스 남동쪽 끝단에 위치하는, 파리에서 가장 먼 지중해 연안도시로 파리에서 962. 8km, 자동차로 약 9시간이 걸린다. 물론 고속도로 사정에 따라 항상 변수는 있다. 대중교통은 니스까지 테제베(TGV)가 있고, 니스에 내려서 망통행 기차를 갈아탄다. 항공편도 마찬가지 니스 공항에 내려 기차나 버스로 이동한다. 지역에서는 니스-망통행 버스가 시간별 자주 운행되고 있다.
알프마리팀(Alpes-Maritimes) 주에 속하며 프랑스의 진주(perle de la France)라는 별칭을 가진, 코트다쥐르(Côte d'Azur)를 찾는 여행객들의 리조트다. 연중 기온차가 적고 겨울에도 온화한 날씨 덕분에 정년퇴직자들의 휴양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탈리아와 모나코 사이에 있으며, 모나코까지 7킬로미터, 이탈리아와는 국경을 두고 있어 걸어서 산책 겸 다녀오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첫 도시 빈티밀르(Vintimille)까지는 11킬로 미터다. 그래서인지 망통 해변은 프랑스인들보다 이탈리아인들이 더 많아 불어보다도 이태리어를 더 자주 듣는다. 이토록 복합된, 이색적 문화를 가진 이탈리아 같은 프랑스다. 그럼에도 30km가량 떨어진 니스보다는 도시가 작아 조용하고 아늑하다. 또 망통 해변은 이탈리아와는 달리 상업적 이익을 위한 파라솔이 금지되어 더욱 자유롭고도 가족적인 편안한 낭만적인 곳이다.
볼거리로는 쟝-꼭또(Jean Cocteau) 뮤지엄, 현대 미술관, 식물원이 있고, 매년 2월에 열리는 레몬 축제도 유명하다. 중심대로 끝 해변가에는 카지노가 있다. 바다를 향해 펄럭이는 유럽 나라들 국기가 망통의 마천루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