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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나 김선자 Aug 06. 2022

여름 최고의 간편 보양식

오이장아찌와 Ratadouille 라타뚜이



열파, 여름다운 한여름 날씨다. 정원에서는 잔디가 누렇게 변해가고, 그늘을 침침히 드리운 무화과나무에서 풍겨내는 비릿한 냄새가 프랑스 남부를 연상시키는 팔월이다. 장기간 계속되는 가뭄에 겨울 동안 머금었던 북향집 습기도, 응달의 이끼들도 뜨거운 볕살에 속절없이 비틀거리며 달아났다. 무덥지만 쾌적하다. 이런 여름은 내 기억으로 처음이다. 여름마다 폭염이 한 번쯤 기승을 부리기는 했어도 35도를 오르는 날이 주기적으로 여러 번 반복되지는 않았다.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기온을 틀림없이 실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여름 날씨가 맨날 잿빛으로 뒤덮은 하늘에서 쌀쌀하게 비나 뿌리고, 그래서 두툼한 긴팔 티셔츠를 꺼내 입어야 한다면 그 또한 얼마나 우울한 일인가?

비록 최고 기온 40도의 신기록을 세울지언정 이런 여름 모처럼 맞는 것도 반가울 뿐이다. 열대야 때문에 밤잠을 설치기는 해도 한국 여름처럼 습도가 높지 않아 에어컨 없이도 견뎌낼 수는 있다.

사실, 겨울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해충들이 얼어 죽어 그다음 농사에 풍년이 오듯이 여름 날씨 또한 그득하게 햇볕이 내려쬐여주어야 텃밭 농사도 풍성하다.

그동안은 장마철이 아님에도 여름 비가 너무 자주 내려 해마다 텃밭 농사를 망쳐놓기 일쑤였다. 특히 가지는 온대성 작물인지 열대성인지 더위를 무척 좋아해서 여름 내내 키워도  포기에 많아야 두세  밖에 얻지를 못했는데 올해는 까맣게 열렸다.  혹서 덕분에 밤마다 활발히 설치던 민달팽이도 보이지 않으니 그만큼 피해도 없어  밤사냥도 휴전 상태다. 따라서 꿈자리가 사납지 않아 편한 잠을   있다.

올해의 텃밭은 유다르게 왕성하고 푸르르다. 모든 남새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우리 식탁에 쉼 없이 제공된다. 보기만 해도 탐스러움을 넘어 기특하다. 가지뿐 아니라 고추, 피망, 토마토, 오이, 호박 어느 하나 소담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특히 애호박은 하룻밤을 멀다 않고 어찌나 훌쩍훌쩍 자라던지 거의 매일같이 거둔다. 그래서 호박케이크를 구워 끊길 날 없이 먹는다.

지난번, 20여 일 바캉스를 보내고 돌아왔더니 그동안 집을 비운 사이 텃밭의 호박과 오이가 징글맞게 자라나 호박인지 괴물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 가운데 좀 작은 것은 여기저기 나누어 주고, 부지런히 요리해서 먹기도, 그런데 큰 것들은 딱딱한 껍질이 야박하게 억세면서 속에는 큰 씨가 박혀있어 남 주기도 남우세스러워,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손가락이 펴지지가 않았다. 설령 지나치게 큰 탓에 흉측스러운 생김새일지라도 화학제품 한 방울 튕기지 않고 자연농법 무공해로 키운, 내 손길 닿은 작물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가까운 이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었다. 그토록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얕게 썰어서 통풍 잘 되는 그늘에 말려 보관했다가 다음 겨울에 꺼내 먹는 것이었다. 이 역시 올여름 불볕더위 덕분이다.





그리고 같은 날 여러 종류의 야채를 동시에 수확할 때는 오이, 고추 간장 장아찌와 라타뚜이(Ratadouille)를 만든다.

여름철 한국인들의 밥상에 자주, 쉽게, 흔히 오르는 대표적인 밑반찬 간장 장아찌는 고춧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아서 남편도 편하게 먹을 수 있을뿐더러, 소화 장애가 있는 내게도 생 야채가 아니라 더없이 좋다. 더군다나 요즘 우리가 강조하는 건강 식단의 일부로써 프로바이오띠끄(probiotique, 프로바이오틱스;체내에 들어왔을 때 건강에 도움이 되는, 살아있는 미생물) 음식 중 하나이기도 하다. 유익균을 함유한 발효식품이라는 뜻이다.

오이장아찌에 사용되는 간장과 식초가 발효 식품임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며, 거기에 텃밭에서 막 따온 무공해 오이와 유기농 설탕과의 조합으로 다시 발효된 장아찌의 효력은 소화는 물론 새콤달콤한 여름철 더위를 날려 보내는 최상의 건강음식이다.

어릴 적에 내가 시시로 들었던 어른들의 지혜로운 말이 있다. 그 시절에는 요즘처럼 위생에 많은 신경을 써지도 못했기 때문에 습하고 무더운 여름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자주 배탈을 일으켰다. 그때 어른들 말씀이 잘 발효된 장국에 국수나 밥을 말아서 먹으면 속이 편하다고 했었다. 그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과학적으로 말하는 프로바이오틱스 음식이었던 것이다.

오이, 간장 장아찌는 1.5리터 유리병에 한 두병 담아놓으면 일주일이면 벌써 동이 나기 시작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텃밭이 크지 않아 5그루를 심은 오이 중 2그루는 비실비실거리지만, 나머지 3그루에서 나오는 오이만으로도 우리 두 식구 먹기에는 충분한 량이다. 그러나 야채가 한꺼번에 수확되지 않은 탓에 사흘이 멀다 않고 자라는 속속 장아찌 만드는 수고 역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신선한 맛에 반해보지 않고서는 그 노고를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마땅한 노력이기도, 그 가치를 충분히 보상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특히 남편 말에 의하면, 오이장아찌 덕분인지 아마도 그래서 화장실 볼일이 참 수월해졌다고도 한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오이, 고추 간장 장아찌 담그는 방법은 굳이 내가 여기서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며, 설사 잘 모른다 하더라도 주변이나 인터넷상에서 쉬이 그 방법을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나처럼.





그리고 라타뚜이, 원래 프랑스 남부 니스에서 유래한, 프로방스 지방의 신선한 제철 채소로 만든 농부들의 음식이었다고 한다. 대체로 여름철 프랑스 가정에서 주 요리에 곁들여 먹는 일종의 스튜라고 할 수 있다. 고기, 생선 등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리면서, 고기나 생선 없이 밥, 면, 감자, 빵과 함께 먹어도 그 맛에는 손색없다. 그럼에도 흰쌀밥과 가장 잘 어울리는, 환상적인 조합의 조화로운 음식이다.

그래서 한국음식 같은 프랑스 요리라고도 할 수 있다. 약 20년 전, 내가 라타뚜이를 처음 알고 맛보던 날, 남편 오랜 친구의 부인 마리 끌로드가 "분명 너도 좋아할 거야"라고 했던 말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그때 나는 그녀의 말처럼 꼭 한국음식을 먹는 것 같아서 입맛은 물론 마음도 정서도 안정되는 것 같았다. 낯선 프랑스 남부의 친구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가족의 식탁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여름철마다 라타뚜이를 한 솥 가득 만들어 놓고 점심식사 때 밥과 함께 먹는다.


라타뚜이는 여러 복합적인 야채가 함께 들어가므로 영양면에서도 우수하며, 대체로 점심 식사 때 밥을 먹는 우리 식단에 더할 나위 없이 잘 맞을 뿐 아니라, 몇몇 다양한 종류의 고기 또는 생선을 주 메뉴로 바꾸어가면서 아주 편리하게 먹을 수 있는 나무랄 데 없는 간편한 여름 영양식이다. 한 번에 여러 끼니를 만들어 놓으면, 더운 여름 불 앞에서 해방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또한 텃밭에서 나오는 재료들을 썩이지 않고 제대로 활용해서 장시간 먹을 수 있으니, 이 어찌 마다 하겠는가!     


주 재료로는 잘 익은 토마토, 가지, 피망(녹색, 노란, 빨강 어떤 색도 가능하며 혹은 섞어 사용해도 무관함), 양파, 마늘이 들어간다. 그리고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 약간, 허브 종류로 월계수 한 잎과 딴(Thym) 조금. 각 재료의 비율은 적당히 기호에 따라 각자가 나름대로 정해도 상관없다. 단, 한 가지 채소에 너무 비중을 두지 말고 균형 있는 비율이면 더 좋겠다. 야채의 비율에 따라서 많은 쪽 야채맛이 더 진할 뿐이다. 내 경우에는 텃밭에서 수확이 가능한 대로 이용하기 때문에 때에 따라 녹색 피망이 많아 우세하게 푸른색을 띠기도, 가지가 많을 때는 검은색이, 어떤 날은 토마토 량이 많아서 붉은색을 띠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붉은색 화사한 색상을 띤 라타뚜이가 더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요리법은 요리사마다 맛의 기호나 취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하지만, 야채를 볶지 않고 썰어 바로 끓이는 것보다는 우리처럼 볶는 식 방법이 더 맛있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양을 한꺼 번에 요리해서 여러 끼니 나눠 먹기 때문에 분명하게 몇 인분으로 명시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특별히 정해진 규칙은 없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한 끼 량만큼 봉지에 담아 냉동 보관해서 틈틈이 꺼내 먹기도 하는데, 요리하기 귀찮거나 피곤할 때 또는 바빠서 주방을 멀리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꺼내 먹어도 그 맛에는 큰 변화가 없으면서 너무 간편하다. 특히 텃밭 수확은 내 의사대로 조절하기가 어려운 탓에 이 방법 역시 참 용이하게 사용된다.


내 요리법을 말하면, 우선 각 채소들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제거한 후, 꼭지를 따서 잘 준비해 둔다. 양파와 마늘도 껍질을 까 놓는다.

큰 냄비에 올리브기름을 두르고 잘게 썬 마늘을 넣어 가볍게 볶는다. 마늘이 적당히 익으면 큼직하게 썰은 토마토를 볶은 마늘과 함께 섞어서 걸쭉하도록 볶는다.

그리고 양파, 피망, 가지는 순서대로 적당히 굵고 크게 썰어서 각 종류별로 프라이팬에다 올리브유를 두르고 볶는다(마늘을 함께 넣어 볶아도 됨). 모든 볶은 야채는 토마토가 든 냄비에 담아 섞어준다. 이때 가지의 굵기는 0.3cm 정도 두께의 반달이나 둥글 모양으로 썰어야 빨리 익고 기름도 적게 먹는다. 하지만 꼭 법칙은 아니다. 이렇게 모든 재료가 담긴 냄비에 약간의 소금, 후추(통후추를 함께 사용해도 좋다), 월계수 한 잎, 딴 두, 세 가지를 넣고 뚜껑을 닫은 후, 약한 불에 반시간 가량 끓인다. 그러면 각종 채소가 혼합되어 깊은 맛이 절묘하게 어울려진, 푹 익힌 야채 스튜가 된다.


이렇게 만든 라타뚜이 스튜에 하얀 쌀밥을 곁들이면, 우리의 비빔밥과 볶음밥이 복합된, 또는 먹고 남은 찌게에다 밥을 넣고 비비거나 살짝 볶아 먹는 맛과 유사하다.

우리는 이 라타뚜이를 흰쌀밥에 올려 어린 양고기 숯불구이 한 덩어리와 함께 먹는다. 거기다 양념된 젓갈 같은 아리싸(Harissa;북아프리카 유대인들의 소스)에 찍어 먹으면 그야말로 여름철 완벽한 보양식이다. 가끔은 양고기 대신 돼지 갈빗살 또는 소시지 숯불구이, 가볍게는 구운 생선과 함께 먹어도 좋다. 그리고 오이장아찌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면 톡 쏘듯 새콤 달콤 짭조름한 맛이, 기름진 입 안을 쾌적하게 한다. 달달하면서도 감칠 나게 우려난 라타뚜이 맛과, 나무와 불 냄새가 속속들이 배인 부드러운 살코기의 육즙에, 적당히 맵고 짠 빨간 고추 젓갈, 하얀 쌀밥의 부드럽고 촉촉한 조화가 입안에서 은은하게 맴돌면서 소르베(Sorbet;아이스크림 같은 빙과)처럼 녹아든다. 이어서 그 특유한 맛이 멜로디처럼 가득히 터져 온 몸으로 진동한다. 거기에는 포도주가 절대 빠지면 안 된다. 한입 가득 씹어 삼킨 후 포도주 한 모금으로 다시 입안을 헹구면서 은밀하고 내밀한 맛으로 되새김질한다.

이 순간만큼은 극도의 흥분과 감격의 도가니가 되면서, 여름 더위 따윈 놀라서 화들짝 달아난다. 그러므로 이 맛에 한 번쯤 길들이면, 마법에 빠지듯 헤어 나오기는커녕, 텃밭의 노고도, 요리하는 수고도, 시간도 절로 보상받은 듯이 멈출 수가 없다. 그러면서 내 여름까지도 그 맛에 내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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