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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나 김선자 Sep 10. 2022

예술탐방; 페르낭 레제

비오트의 레제 미술관을 거쳐 그의 특별전을 보러 로데즈에 갔다



우리가 로데즈(Rodez) 방문한 이유는 레제 특별전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어쩜 겸사겸사라고 하는   맞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술라주 미술관이 궁금했었는데, 마침 지난번 니스 근처 비오트(Biot)에 있는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 미술관을 찾았을 때, 그의 특별전이 여기서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느 중간 지점에서 하룻밤 투숙하려던 계획을 일정과 행로를 약간 변경하여 술라주 미술관과 노트르담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있는 산골 소도시 로데즈에 묵으면서, 이왕지사 가까이 중세   포이 두개골 유물 숭배의 중요 성역이었던, -쟈크(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순례길로도  알려진 아름다운 중세마을 꽁끄(Conques)까지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는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 우선 레제 작품부터 감상했다

로데즈의 술라주 현대 미술관과 함께 그의 작품에 관해서는 차후 말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일단 미루어 두고,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 대해서만 아는 대로 소신껏 펼쳐 보기로 하겠다.

그렇다고 레제 작품 비평가도 전문가도 아닌 내가 아주 깊고 고 차원적인 이론이나 비평적 평론 글을 쓰겠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작품을 직접 보고 느낀 점과 일반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작가로서의 견해와 관점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사실 그동안은 레제 작품에 대해서 자세히는 몰랐다. 아주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범위 내에서만 아는 정도였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특별전시를 통해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그의 작품을 좋아하며 관심 두고 특별히 찾아다니면서 보지도 않았었다. 아는 만큼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꼬다쥐르를 여행하면서 비오트에 있는 레제 미술관을 방문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다방면에 걸친 다양한 작품들에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동안은 없었던 새로운 시각으로 그의 작품을 보고, 매우 흥미롭게 느꼈으며, 마침내 깊은 인상을 받아 매료되기까지 했다. 이처럼 그의 작품을 구체적이고 세심하게 감상함으로써 그것에 감겨있었던 눈을 뜬 것이다. 덧붙여 그의 비오트 미술관 전체 분위기가 한몫을 톡톡히 하지 않았다고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술관 안쪽 측면의 모자이크
정원에 설치된 조형물


꼬다쥐르(Côte d'Azur)의 작은 마을 비오트(Biot)에 있는 레제 미술관은 조용한 주택가의 경사진 땅에 화려하거나 거창하지는 않지만 우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 농장이었던 땅을 1955년 사망하기 몇 달 전에 페르낭 레제가 구입을 했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그의 부인을 비롯한 가까운 협력자들이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이 자리에 페르낭 레제 미술관을 건립했다.

1969년에는 재단 설립자들이 미술관 건물을 포함한 300여 점의 풍부한 소장품들을 국가에 기증하였고, 당시 문화부 장관은 이후 칸의 영화제 움직임에 맞춰, 조항에 따라 국립 미술관으로 결정되었다.   


1960년에 설립된 미술관은 활기차면서도 안정감을 주는 소박한 건축미와 풍성한 조형적 공간이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져 전혀 권위적이거나 거만하지 않으며, 그의 작품 및 성향과도 부합되게 느껴졌다. 외벽에는 그가 생전에 하노버의 경기장을 위해 구상했던, 그러나 실현하지 못한 거대한 모자이크 작품이 정면과 양 측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미술관을 건립하면서 그의 협력자들에 의해 결정되어 제작된 것이다. 그의 모자이크 조형물과 조각품 역시 간결하게 꾸며진 정원 가장자리에서 활기참을 주며, 자연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다. 시원스럽게 확 트인 멋진 공간이다.

눈부신 태양이 살갗을 찌르며 따갑게 내리쬐는 날, 이 멋진 공간에 방문객이 거의 없어 마치 휴양을 위해 마련된 자리 같은 평온함을 선사했다. 실내 또한 단조로운 구조이나 외부에서 느낀 것보다도 훨씬 넓고, 효율적인 공간이다. 결코 보여주기 식 이름 좋은 하눌타리 미술관은 아니었다.

소장품은 회화 및 데생 작품도 다수가 있었지만, 한때 전위 영화에 열정을 쏟은 만큼, 아니면 여름 특별전으로 기획된 것인지는 몰라도 필름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그림을 좀 더 깊고 폭넓게 보기 위해 로데즈에 있는 술라주 미술관을 찾기로 했던 것이다.



페르낭 레제 미술관 전시장 내부 모습


페르낭 레제는 1881년에 노르망드 지방 아르장탕(Argentan)에서 태어나 1955년에 파리 근교의 쥡-쉬르-리베뜨(Gif-sur-Yvette)에서 사망한 프랑스 화가이며, 동시에 영화감독, 디자이너,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장식가, 도예가, 조각가, 데생, 삽화, 판화가 등 다방면에 걸친 예술 활동을 했었다.

그는 19세에 캉(Caen)에서 건축 공부를 하고, 1900년 파리에 도착한다. 미술학교(Beaux-Arts) 입학에 실패한 그는 파리의 아카데미 그랑 소미에르(l'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에서 수업을 받았다.

레제는 1907년 파리의 대부분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세잔의 작품 회고전을 보고서 깊은 인상을 가졌고, 같은 해에 입체파의 피카소와 브라크를 발견하여, 그들에게서도 영향을 받는다. 그 후 그는 세잔에게 도전을 하지만, 자신이 결정적으로 추구하고 지향하는 그림은 이미 세잔에게 큰 영향을 받았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에 정착한 그는 공동 작업실에서 작업하며 많은 작가들을 만난다.

이후, 그는 비-구상적 몽마르트르의 입체파 피카소, 브라크와 구별 짓는 독창적인 입체적 작품으로 현대 추상화의 길을 연다. 그리고 원뿔로부터 구성 짓는 세잔의 교리에서도 벗어나, 과거 전통과의 단절, 근대 문명의 속도와 기계를 찬미하는, 대상이 움직이는 매 순간을 동일 화면에 그려내고자 했던 이탈리아 미래파 쪽으로 향한다. 따라서 아래 좌측 작품 <도시의 디스크, 1920>나 우측의 <빨간색 바탕 위에 기계적 요소, 1924> 같은 작품을 실현했다.



좌; Les Disques dans la ville, 1920 / 우; Eléments mécaniques sur fond rouge 1924
레제와 그의 작업실 모습
왼쪽; Les constructeurs 건축업자, 1950


1945년 그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담하여 생을 마감하기까지 회원으로 남는다. 그런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작품들 가운데서 현장 노동자들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위 1950년 작품 <건축업자>에서도 잘 보이듯이, 대체로 배경색을 밝게 칠하여 노동 현장의 활기참을 주었고, 직선과 사선으로 짜인 공사장 구조물에서 그 구성을 견고하고 강건하게 나타내면서, 변화감을 주었다. 구조물이나 인물들을 다소 정적이게 표현하는 대신, 인체 근육질과 구름의 곡선, 그리고 구조물의 사선 덕분에 전체적으로는 동적인 힘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화면 전체에서 활력 넘치는 강인한 노동자와 더불어 희망에 찬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 지식인들이 느꼈던 이상적 공상당의 모습일 것이며, 또한 미래주의가 최대 목적으로 지향했던 전통과의 단절, 근대문명이 낳은 기계에 대한 찬미, 다이내믹한 도시 등과 함께 힘, 운동, 모험, 젊음 그리고 사회 파시즘적 영향이지도 않았을까?   


그의 후반기 작품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여가를 즐기는, 시골에서, 캠핑하는 사람들 모습 등으로 윤택한 삶에서 오는 평온함을 즐겨 표현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분명하고 솔직하며, 농부처럼 투박한 아방가르드적 외향이나 그의 성향과도 무관하지 않은, 직설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은 뚜렷하고 선명하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색상과 형태, 구성, 그리고 형태를 검은 윤곽선으로 나타낸다는 점이다. 

이 검은 윤곽선은 화면 속 인체나 사물들을 구별 지어 명쾌하게 차별성을 나타내면서, 그 고유한 존재에 대한 독립성도 보장한다. 이 과감하고도 강렬한 선들의 활기참은 곡선에 의해서 딱딱함보다는 유연하고 경쾌하여, 자유롭게도 다가온다. 또한 둥글고 풍만한 근육질의 인체 표현은 투박하고도 거친 듯 하지만, 강건함을 주면서 차라리 풍요와 여유로움마저 가져온다. 그리고 색상의 기본적인 이 원색 대비는 설령 유아적이고 불안정하게도 느껴지지만, 검은 윤곽선에 의해 다시 차분하게 정리된다. 

그림의 구성면에서는 모든 대상에 동일한 가치로서의 역할이 주어져, 계층을 두거나, 나누지 않고 화면을 꽉 채우는 방식, 이것은 현대회화에서 주로 나타나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구성 요소들이 화폭을 벗어나거나 잘려 나가는 경우가 없다. 

또 정면을 향해 일렬로 배열된 모습은 마치 이집트인들처럼 아니면,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앞을 바라보는듯한 군상, 이 역시 현대적인 배열인 동시에,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의 그림을 연상하게 하는 고전적인 양식도 병치해서 나타난다. 또한 꼭 다문 입의 선명한 표정에서는 고대 그리스 조각상을 보는 듯도 하다. 이러한 예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 시리즈나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 <시골 풍경>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그는 한 주제를 두고 여러 재료를 병행하며 자주 시리즈로 실행했다.

그의 후반기 작품 중 대표적인 <잠수부들> 시리즈에서는 특히 대담한 곡선을 사용하여, 유연하면서도 과감한 동적 표현임과 동시에, 화폭을 전혀 벗어나지 않은 형태들의 구성에서 마치 물속에 깊숙이 빠져든 느낌으로 정적인 표현이 최대화되었다. 바다 깊숙한 곳에서 전해지는 이 잠잠하고도 고요한 율동! 

나는 그곳에 있었다. 




 

레제는 성당의 비트로(vitraux, 스테인드글라스) 작업과 리토 그래픽을 비롯한 모자이크, 조형물 등 다양하게 작업을 이어가기도, 몇몇의 미술학교를 포함한 아카데미를 관리하며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했었다. 

아쉽게도 그의 미술관 유리창에 제작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에서는 감흥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돋보이는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리 대가라도 모든 작품이 경지를 이를 수는 없으리라.


비오트의 레제 미술관을 거쳐 술라주 미술관에서 레제의 특별전 까지. 

거기서 나는 흡사 한 마리의 애벌레가 차츰 성장하여 자유롭게 비상하는 모습까지를 본 것 같다. 

사실 그동안은 세잔,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모네 등에 가려져 페르낭 레제의 작품이 잘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번 기회에 그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뻤다. 특히 그의 특별 전시장에서는 몇 바퀴를 천천히 돌면서 아주 주의 깊게 그의 작품을 감상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작품 앞에서는 아주아주 오래 머물렸다. 그가 말년에 실현한 작품들, 솔직히 여기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 외에 딱히 더 이상의 다른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어떠한 훌륭한 격언이나 명언이 또 있을까?



 좌; Les quatre cyclistes 네명의 자전거 타는 사람들, (1943-48) / 우; Le campeur 캠핑객, 1954
Les loisirs sur fond rouge 빨간 바탕색 위의 휴식, 1949
La Partie de campagne 전원에서의 파티, 1953
Les Plongeurs 잠수부들, 1941
Les grands Plongeurs noirs 커다란 검은 잠수부들,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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