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를 보러 갔다.
애절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 이층 작업실에서 흘러나온다. 그 울리는 목소리가 거친 파도에 휩쓸리듯 가슴을 저민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Amália Rodrigues, 1920-1999)가 부르는 파두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는 포르투갈의 전설적인 가수이자, 영원한 <파두의 여왕>이라 불린다. 그녀가 사망하자 사흘간 국장이 선포될 정도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가수, 문화 대사다. 특히나 리스본 파두가 그녀의 유명세와 함께 전 세계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어제저녁에 마을 성당에서 작은 콘서트가 열렸다. 우리도 파두를 보러 갔다. 그러나 실망과 더불어 아쉬움만 적잖이 안고 돌아왔다. 서운한 마음을 달래려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의 레코드 판을 꺼내 듣고서는, 다시금 아침에 틀어 놓은 것이다.
내가 사는 이곳, 그홀레 마을 행사에 참석한 적은 20여 년 거주한 이래 한 번도 없다. 내 기억으로는 처음이다. 전시회나 공연 등 문화생활은 주로 파리에 기반한다. 해마다 열린 포도주 박람회에서 고작 포도주를 구입하는 게 전부다. 왜냐하면 파리가 가깝기도 하지만, 마을 문화행사라는 게 대체로 뻔한 수준이라 참석할 만큼 발길이 선뜻 내키지를 않았다. 아니 어떤 문화행사가 열리는지 생각조차도 해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반반한 공연장 하나 없으니 당연히 있을 리 만무하다 여겼다.
그런데 우연히 그홀레 성당에서 파두 콘서트가 열린다는 광고를 보고 곧장 신청을 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음악 장르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에서 쉽게 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발걸음이 사뭇 가벼우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콘서트 시작은 저녁 8시. 이른 저녁을 먹고 대문을 나섰다. 걷기로 했다. 성당까지는 걸어서 채 10여분 거리. 어둠이 내린 저녁의 축축한 습기와 성당 안의 서늘한 기운을 대비해 두툼한 옷을 꺼내 입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중충한 날씨에 주택가임에도 토요일 저녁은 외출하는 자동차들의 움직임이 많다. 설마 모두가 콘서트에 가는 건 아니겠지! 남편과 농담을 던지며 서로 한 마디씩 주고받는다.
그동안 나는 파두에 관한 공연은 물론, 직접 부르는 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파두라는 노래가 있다는 것도, 그걸 들어본 것도 불과 오래되지 않았다. 몇 년 전 리스본에 갔을 때, 파두 공연을 보려고 밤거리를 헤매어 공연장을 찾아 기웃거리기는 했지만 결국 듣지를 못했다. 관광객들을 위한 작은 레스토랑에서 파두 공연이 있었으나 크게 흥미를 당길 정도 프로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포기했었다.
파두는 분명 포르투갈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노래일뿐더러 프랑스의 많은 사람들도 좋아한다.
사실 음악을 잘 모르는 나 역시도 파두가 좋다. 그에 대한 지식 여부를 떠나 들으면서 거부감이 없고, 특별한 감정으로 그 리듬에 빠질 수 있다면 좋은 노래가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그런 것이다. 이론보다 듣고 음미하며 느끼는 것.
하지만 파두란 누가 어떻게 부르는가에 따라 그 느낌의 차이가 엄청나다. 그러므로 노래하는 가수가 중요하다. 이번 공연에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성당 앞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적막함이 감도는 조용한 분위기다. 성당문을 열고 들어서니 후끈하게 따뜻한 온기가 밀려든다. 온방 시설을 한 것인지, 촛불 때문인지, 사람들의 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리 온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역시나 포르투갈인들이 많이 보인다. 우리가 아는 사람은 이웃은커녕 한 명도 없다. 우리는 앞에서 두 번째 줄 가운데로 안내되었다. 좋은 자리다. 역시 예약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앉아서 기다렸다. 지역 행사란 게 꼭 예정된 시간대로 움직이지를 않는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크지 않은 성당이나 한가운데 가득 놓인 의자를 거의 다 채웠다. 그홀레 시장도 왔다. 그는 콘서트를 주체한 몇몇 위원회 사람들과 악수를 나눈 뒤 맨 앞자리에 착석한다. 위원회는 당연 오리지널 포르투갈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은 시는 포르투갈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이 동네에 제법 많이 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면서 콘서트 또한 그 일련의 행사와 무관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파두 콘서트가 벌써 몇 년째 열리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새삼 그동안 우리가 무관심했던 게 역력해 보인다.
프랑스에는 오리지널 포르투갈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유럽의 동일한 가톨릭 문화권이라 프랑스 사회에서도 쉽게 적응하여 흡수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이 프랑스로 이주한 시기는 60년대, 70년대다. 그 근본적인 원인과 역사적 배경으로는 독재자 살라자르(salazariste)로부터 피신하여 보다 나은 조건의 삶을 찾기 위함이었다. 특히 1973년 시작으로 포르투갈에 경제적 위기가 닥쳐왔고, 1974년 포르투갈 독재자의 끝을 알리는 <카네이션 혁명>과 함께 <거룩한 30년>의 종말을 고하면서 그 흐름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경제가 점차적으로 나아졌지만, 이들에게 <오두막집의 사람들>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가난했었다. 이들 대부분은 프랑스에서 주로 건축업에 종사하면서 대도시나 근방 도시에 터전을 마련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파두(fado)란 포르투갈어로 숙명을 뜻하며, 포르투갈 음악의 한 장르다. 몸체가 둥근 모양의 포르투갈 기타와 포르투갈어로 비올라라 부르는 클래식 기타의 연주에 맞춰 부르는 노래다. 때로는 이 두 악기와 함께 어쿠스틱 베이스 기타나 콘트라베이스 반주가 포함되기도 한다.
그 기원은 오래전부터 구두로 전해져 내려오나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아마도 1820년 또는 1840년대로 나타난다. 분명한 건 포르투갈 선원들의 억양으로 보아서 선원들이 부르던 노래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따라서 파두는 포르투갈인들에게서 운명처럼 발생하여 그들의 숙명 같은 삶을 노래한다.
국토 대부분이 대서양을 낀, 지구의 땅끝, 미지의 발견을 꿈꾸며, 기약 없이 떠나는 선원들, 그 긴 향해, 그들 뒤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슬픔과 체념, 감수. 이 불투명한 행운에 대한 갈망과 환상으로 혼합된 우울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다. 또한 충족되지 못한 사랑과 질투, 죽음과 과거에 대한 향수와 고통, 애환, 슬픔, 그리고 그리움과 외로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 응어리진 마음을 달래며 삶을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되어 준 노래, 민중의 울림, 서민들의 파두다. 그래서 솔로 가수는 주로 어두운 옷을 입고 노래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본 이날 콘서트는 이러한 파두와는 전혀 달랐다. 공연 내내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솔로 가수의 태도가 파두 공연을 방해했다. 그녀는 두 기타리스트의 멋진 연주까지 망쳐 놓았다. 파두에 대한 만족도가 지나치게 높아서인지, 프랑스인으로 파두를 부르는 게 아주 자랑스러워서인지. 그녀는 혼자서 너무나 즐거웠다. 깊고 짙은 삶의 체험이나 가슴 저린 애통함 없이 부르는 그녀의 노래에서는 진정한 파두의 음미가 살아나지도 잘 전해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곡이 끝날 때마다 잊지 않고 덧붙이는 해설은 노래보다 더 길었다. 곡에 대한 끊임없는 설명과 주해. 지겨웠다. 파두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정도의 일반적 설명까지.
마치 그녀는 중등학생을 앞에 두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그녀의 강의실에 온 것이 아니다. 노래를 들으러 콘서트에 왔던 것이다. 진정한 가수라면 노래를, 노래로 자랑하면 된다. 구구절절한 설명 따위가 무슨 소용일까?
그럼에도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좋은 목청으로, 제대로 된 파두의 감정을 자아내지 못했던 점이 아쉬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모인 이민자들의 고된 삶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조금이나마 달래어졌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오늘날의 파두에는 애절한 멜로디뿐만 아니라 일상의 아이러니를 즐거운 감정으로 노래하는 현대적 장르도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파두란 역시 애틋한 삶의 고통과 그 감정 없이는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는다. 그 진정한 의미나 깊이감이 없다.
특히 파두는 프랑스어가 아닌 포르투갈어로 불려야 가락에 더 진 맛이 난다. 포르투갈어의 구르는 발음과 약간 쇳소리 같은 끝 음에서 파두의 서글픈 감정이 우려 난다.
그녀는 포르투갈 파두를 프랑스어로 번역, <페르난도 페소아> 시를 또는 <보들레르>의 시를 프랑스어로 부르기도 했다. 변형된 파두? 현대식 파두? 다양한 시도라고 칭찬이라도 해 주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럴 마음이 없다. 기대가 지나쳤던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우리 의도에는 너무 빗나간 콘서트였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날의 파두는 한 마디로 즐거운 토요일 저녁의 흔한 콘서트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의 목소리로 다시 듣는다.
그녀의 노래, 가슴을 아르르 저미는 큰 울림의 소리, 파도를 부르는 파두 속에 녹아든 애절한 목소리, 역시 진정한 파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