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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나 김선자 Aug 19. 2023

알바니아 여행 II

2 여정의 일부를 바꾸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 또한 큰 법인가? 거칠고 피폐했던 하루의 일탈은 정신까지 갉아먹는다. 

먼저 따뜻한 물로 하루종일 쌓였던 피로부터 씻어 내렸다. 회의적이던 기분도 한결 가벼워진다. 분위기도 전환시킬 겸 밖으로 나갔다. 

저녁녘 해변가 거리는 삼삼오오 산책 나온 사람들로 붐볐고, 우리도 그들 속에 끼어 반원을 그리며 백사장 끝까지 걸었다. 적당히 분위기 있는 자리가 보이면 도착 첫날을 기념하며 축배의 잔을 들려했지만, 딱히 발길을 끌어당기는 곳이 없었다. 우리는 집에서 대신하기로 하고 장을 보았다. 비록 여행 중이라도 최소한 아침식사만큼은 평소 우리 다이어트 식단을 고수한다. 다행히도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미니 마켓이 있었고, 없는 것이 더 많지만 그럭저럭 구색을 갖출 수 있었다. 

발콩에서 해거름의 바다를 내려다보며 한잔의 맥주와 토마토 샐러드를 먹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사란다의 토마토와 옥수수 빵만큼은 그 맛이 최고였고, 덕분에 작은 행복감과 긴 하루동안 지친 몸과 마음에 위안을 준다. 빵가게 젊은 여직원은 동양인을 자주 보지 못해서인지 내게 호감 가는 특별한 말과 함께 친절도 베풀었다. 

그리고 첫날밤을 보냈다.

지난 코르푸 섬에서 설친 잠까지 몽땅 잤다. 멋이야 어떻든 역시 조용해서 깊이 있게 푹 잤던 것이다. 과연 잠이 보약! 맑고 강건한 정신력으로 재충전되었다.  

아파트는 다행히도 우리를 포함해 두세 집을 제외하면 텅 빈 상태라서 벽과 층간소음이 적었다. 하지만 성수기 때 세입자가 늘면 방음 문제가 심각할 것 같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그런데 느린 인터넷 속도는 주인아들의 태도만큼이나 화나게 했다. 남편과 내가 동시접속은 거의 불가능했고, 혼자서도 인내심을 발휘해야 겨우 연결되었다. 현관문을 열어 놓기도, 현관 밖에서, 베란다로 나가 작동해 보기도 했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인터넷 모뎀이 우리 아파트 내에 설치되어 있지 않은 공용 시스템이었다. 결국 어제 같은 짜증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 덕에 소설책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었다. 


* 에피소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전화사용내역을 받아본 결과 내 핸드폰 사용료가 62유로 추가분이 나왔다. 알고 보니 사란다에서 잠깐잠깐 되었던 인터넷 접속이 결국 국제 유료망이었던 것이다. 제대로 사용도 못해보고 9만 원 상당을 지불한 꼴이다. 


사란다(사란데, Sarandë), 알바니아 남서쪽 이오니아 해안가에 있는 이 현대적 신도시는 개발이라는 거친 파도를 타고 다이내믹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흔히 무슬림 나라에서 자주 보이는 동네찻집마다 남성들끼리 모여 앉은 모습이 비근하게 띄었고,  권위적이며 딱딱하게 경직된 분위기가 결코 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까지 제지시켰다. 그러나 이웃나라 그리스의 관습과도 통하는 구세대 미망인들 특유의 검은색 옷차림새가 꽤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 외 옛것이라고는 도통 보이지 않았다.  

거리에서는 혼잡한 자동차들의 모습에서 심각한 빈부격차를 느끼게 한다. 엔진 매연을 지독히 품어대며, 외국어가 인쇄된 채 운행되는 많은 중고차들 가운데서 고급자동차도 대조적으로 쉽게 목격된다. 건물들은 건축법도 규칙도 무시한 듯 무조건 짓고 보자식. 다시 말해 이 모두가 혼잡과 무질서, 그리고 불투명한 사회제도로 보였다. 

백사장 주변으로는 경쟁하듯 빈틈없이 촘촘히 늘어선 건물들. 온통 호텔 간판뿐. 운영이 되고 아니 되고는 미지수, 우선 너도나도 뛰어든 모습. 이 답답한 공간이 숨 막힐 것 같았다. 게다가 백사장에서 떨어진 호텔들은 바위 위에 편평히 시멘트를 발라 모래로 덮고 인위적 해변을 만들어 쎈베드, 파라솔 몇 개 비치한 모습이 하도 풍자적이라 쓴웃음이 나왔다. 마치 소꿉장난 같았다.

그런데 중심가에서 세 블록만 뒤쪽으로 물러나면 그야말로 빈민촌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다. 짓다가 중단된 아파트는 시멘트와 철근이 솟아 방치되고, 마감처리가 전혀 안된, 블록의 틈과 구멍이 그대로 드러난,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벌거숭이 상태, 그럼에도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씁쓰레 삭막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창틀에 매달려 나풀거리는 빨랫감은 푸르른 이오니아 바다와 함께 인정으로 묻어났다.

이 얼마나 조급했던가? 거칠고 살벌한 풍경은 다급해진 개발도상국의 무지막지한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마치 사회적 병폐와 부조리, 건설 마피아 무리들의 형국을 엿보는 것 같았다. 사란다는 물론 그 근방 해변의 작은 도시들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더 어수선해 보였다. 관광객을 유치하려 혈안이 된 모습으로 비쳤고, 여행의 질은 형편없었다. 오직 숙박료가 유럽의 나라보다 저렴한 까닭에 주로 젊은 층 여행객들을 끌어들였고 대부분 전통이나 미적 추구보다는 젊음자체를 즐기려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현대화의 식상한 파도를 피해서 왔건만 결과적으로 그 속에 퐁당 빠져버렸다. 썩 유쾌하지가 않았다.  


다행스럽게 그나마 사란다에서 볼거리라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 국경 쪽으로 14킬로미터 떨어진, 버스를 타고 30여분 가면 부트린느(Butrint) 국립공원이 나온다. 그곳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고대로마와 비잔틴, 베네치아 등 여러 시대를 거쳐온 유적지와 유물박물관이 있다. 유적지는 님프를 모시는 신전과 로마식 온천, 야외극장, 예배당 및 공회당 그리고 중세 성벽과 <사자의 문>이라 일컫는 마을 성문이 있다. 비잔틴시대 모자이크가 있으나 우리는 볼 수 없었다. 보존상 성수기 때만 잠깐 개방할 뿐 모래로 덮여 있었다. 또한 바다의 넓은 간척지와 함께 예스러운 통나무 이동 다리가 아직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아주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그려졌다. 우리는 여기서 한나절 여행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과감히 여행의 경로를 바꿨다. 사란다의 해변 분위기는 우리 마음을 썩 끌지 못했다. 그래서 자금이후의 목적지 가운데 사란다 북쪽에 있는 이마레(Himarë) 해안가 도시를 포기했다. 사란다 및 인근 해반 분위기로 보아 이마레 해변도 마찬가지라 여겨졌다. 그리하여 나는 실망한 사란다에 대해 보상이라도 받을 심산으로 무려 사란다보다 세 곱의 값을 치르고서 코르푸 섬 남쪽에 있는 넓은 시골집을 예약했던 것이다. 결국 코르푸 섬으로 되돌아가 그리스 해안가에서 쉬기로 했다. 솔직히 경비지출이 적은 여행을 꿈꾸었다가 결과적으로 훨씬 비싼 값을 치른 꼴이다. 그리고는 코르푸행 배편 티켓도 예약했다. 그런데 여기서 반갑지 않은 뜻밖의 사고가 발생한다.


* 에피소드; 약 보름 후 우리가 이탈리아 레체에 도착한 이튿날, 은행사용내역서를 확인했고, 그 결과 은행 비자카드가 해킹당했음을 알았다. 전혀 가지도 알지도 않은 호텔과 꽃집에서 2000유로 상당의 돈이 지출되어 있었다. 그 시점이 바로 우리가 사란다에 있던 때다. 알바니아에서의 모든 지출은 들고 간 유로를 즉석에서 환전해 이용했을 뿐, 카드사용은 오직 코르푸 섬 바캉스 집과 배편을 예약한 게 전부였다. 급기야 여러 과정과 조치를 취한 결과 은행에서 전액 환불해 주었다. 다행히도 원만히 해결되어 우리의 손실은 없었지만, 한나절을 이 일에 얽매이게 했다. 그로 말미암아 알바니아는 역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로 여겨졌고, 결코 우리에게서 마피아가 설치는 불명예를 벗을 수가 없었다. 


원래 우리의 여정은 사란다에서 지로카스테르를 거쳐 아름다운 옛 마을 코르처(Korçë)까지 갔다가 이마레(Himarë) 해변가에서 긴 휴식을 취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마레에 이어 어렵사리 코르처 여행까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우리의 실수도 큰 한몫을 했다. 그 이유는 남편도 나도 운전면허증을 들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발 전에 깜빡하고 챙기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자동차 렌트는 불가능했고, 우리는 버스를 알아보았다. 

코르처 옛 도시는 깊은 산골에 자리해 아직 도로가 정비되지 않은 까닭으로 험악한 산길을 지나야 했다. 그런데 코르처행 공공버스는 아침 5시 30분에 출발하는 한대가 전부였고, 그것도 남은 좌석이 있는 경우만 가능했다. 그 외 개인이 운영하는 미니버스가 있지만 이 또한 알바니아 중부 도시 엘바산(Elbasan)을 거쳐 다시 우회해서 내려오는 노선이었다. 따라서 5시간 내지 6시간 걸리는 거리를 10시간이 넘게 소모된다고 했다. 그 역시 좌석이 다 채워져야 떠날 수 있으므로 그때까지는 무작정 기다려야 한단다. 결론적으로 언제 출발할지 아무도 몰랐다. 또한 지로카스테르에서 코르처 가는 그 산악 풍경이 보고 싶었던 것인데, 그 경로가 아닌 것이다. 

남편은 그럼에도 가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으나 나는 중고미니버스를 보고서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동차로 간다 해도 염려가 전혀 없지가 않은데, 하물며 에어컨 작동도 안 되는 비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20명 남짓 손님을 태워 땀냄새는 물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10시간을 달릴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멀미가 났다. 그때부터 나는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그리스 북쪽을 여행하면서 코르처까지 가던지, 또는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Tiranä)에서 코르처로 내려와 그리스 북쪽으로 가는 여정을 제안했다. 결국 나의 설득이 성공했던 것이다.  


4박 5일을 보낸 사란다에서의 마지막날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알바니아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와 독재자로 유명한 엔베르 호자의 고향이며 그 지방의 독특한 건축양식이 잘 보존된 지로카스테르(Gjirokastër)로 가는 날이다. 

우리는 지로카스테르를 가기 위해 시간보다 40분을 일찍 나왔다. 한데 또 문제가 생겼다. 지로카스테르 행 역시 개인이 운영하는 미니버스인데, 이미 손님이 차서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분명 방금 표를 살 때까지도 그런 정보나 말은 없었다. 

이 도시는 모든 시스템이 흡사 두터운 검정커튼 속에 가려진 듯 불투명했다. 만약 이 차를 놓치면 다음 버스는 5시간 후에나 있다. 이렇게 또 길바닥에서 허송세월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 판국이었다. 그런데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전개되었다. 분명 우리보다 늦게 도착한 알바니아 사람들을 받아 태우고 있지 않은가. 기분이 언짢기도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기들 언어로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정확히 따질 수도 없었다. 어쩜 전화상으로 예약을 했을 수도 있겠다는 긍정적 추론을 하면서 그냥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 시간에 특별히 갈 데도 없으니까... 마침내 두 젊은 여성 여행객은 운전사와 약간의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운전사는 하나 둘 모여드는 손님들 수를 보고서야 차량 한 대를 더 부른다. 비로소 우리는 그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정말 인내심과 참을성이 필요한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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