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에서 온 친구들
올 겨울도 어김없이 그들은 왔다. 새해 꼭두 머리에 만난 우리는 예년과 다름없이 정겨운 회포를 풀었다.
일 년 중 많게는 두서너번, 적게는 한두 번 겨우 만나지만 한결같은 우리들의 우정, 그것은 깊은 세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루트에 사는 우리의 친구 독일-프랑스 커플은 해를 번갈아 한 해는 성탄절, 다음 해는 신년을 맞으러 파리로 온다. 지난 성탄절은 샤빈의 어머니댁 독일에서 보내고 새해는 프랑스 프레드릭 가족과 지내기 위해 왔다. 그들의 한정된 짧은 시간, 그 틈새를 비집어 우리와 해우를 한다.
올해는 코비드로 인해 카페, 레스토랑이 모두 문을 닫아 겸사겸사 그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저녁 8시 야간 통행금지 실시로 인하여 저녁보다는 점심식사를 하자고 했었다.
사실, 식사초대를 집으로 하면 여러 장단점이 따른다. 사랑과 배려심으로 묻어있는 식탁과 조용하고 안락하다는 점은 좋지만 반면, 주방에서 요리를 담당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는 한, 대화를 마음껏 즐길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초대된 손님이 여럿일 경우에야 주인이 자리를 잠깐 비우더라도 분위기가 어색하거나 썰렁하지 않지만 커플끼리 만난 자리에서는 초대된 친구만 테이블에 앉혀두고 부엌일을 한다는 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예의상 어긋나고 모양도 나쁘다.
초대를 한다는 건 대화를 통해서 교감을 나누는 것이지 단지 밥을 먹기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이 함께 자리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부엌에서는 음식이 식어가거나 너무 익어 타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오늘처럼 남편이 생굴을 까는 동안 내가 식탁에서 친구들 말동무가 되던 사이 내 요리는 그릴에서 졸아들고 있었다.
프랑스 요리라는 게 한국음식처럼 한상에 다 차려놓고 먹는 것도 아닌지라, 아뻬로띠프(apéritif, 식전 술)부터 전식, 본식, 포마쥬(fromage, 치즈), 후식 그리고 커피타임까지 그 과정이 참으로 요란스러워 한 차례가 끝날 때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식기를 바꾸러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붙였다를 반복해야만 한다. 아무렴 친구끼리 약식으로 준비했는데도 숟가락을 포함한 포크, 나이프가 한 명당 대여섯 개가 나왔다. 이 얼마나 부산스럽지 아니한가!
그로 인해 깊은 대화가 원활히 진행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코비드가 바꿔놓은 습관과 관습
오늘 우리들의 대화 주제는 역시나 코비 19에 중점을 두고 이어졌다. 프랑스를 비롯해 독일, 한국에 대한 확진자 수치와 방역 비교, 백신에 관한 것들까지. 그리고 그로 인하여 발생한 문제점과 새롭게 생겨난 이색 문화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이러한 많은 변화들 가운데 가까운 내 주변에서 일어난 흥미로운 현상이란 눈에 띄게 부쩍 늘어난 동네 산책자들의 수와 인사, 그리고 사라져 버린 프랑스의 인사법 비쥬(bisou, 서로의 뺨을 맞추는 프랑스 인사법)다.
이 아름다운 프랑스 관습 비쥬는 오랜 전통이며, 친한 사이끼리 나누는 우정과 애정의 표시로써 상대방의 볼에 자신의 볼을 살짝 갖다 대는 인사법이다. 사람이나 관계, 처한 상황과 경우에 따라서는 뺨에 입을 맞추듯 진한 표현도 가능하다. 또한 지역에 따라서는 두 번 또는 세 번, 네 번씩 횟수만큼 그 지방의 짙은 인정까지 느끼 수도 있다. 가령, 대도시 파리나 일드프랑스 지방은 두 번이 일반적이지만, 북쪽 지방과 시골에서는 양쪽 뺨을 오가며 네 번의 비쥬를 한다.
이 행위는 생전 처음 만난 사람이던, 아주 오랜만에 만난 경우라도 보다 빠르게 다가갈 수 있는 친밀함과 반가움의 표시이기도 하다. 어떤 간극으로 닫혔거나 굳어진 마음을 쉽게 녹이고 열게도 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때와 시공의 틈을 좁히는 무언적인 최선의 도구였다.
오늘날 개인주의적이고 냉정한 현대사회에서마저도 이 가벼운 신체접촉 인사는 의도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서로 간의 좋은 감정으로 마음을 끌어당기는 인간적인 행위다.
현재 코비드가 이 고유한 관습을 의도적으로 막고 경계하도록 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전통조차 바뀌어 버렸다. 따라서 우리는 볼도 아니고 살을 맞대는 악수도 아닌 고작 팔꿈치로 그것도 외투 위에서 툭툭 치는 인사로 대신한다. 비쥬가 사라진 만남에서의 첫 대면 인상은 끈끈하게 오가던 친근감도, 따뜻함도 식어버린 듯 참으로 싱겁고 허전한 이 아쉬움, 마치 프랑스 식탁 위에서 바게트(baguette, 긴 빵)와 포도주, 포마쥬(fromage, 치즈)가 빠진 것처럼 밋밋하고 썰렁한 기분이었다.
우열곡절 모두 맛있게 식사를 끝내고,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소화도 시킬 겸, 우리는 걸어서 쟝 자크 루소의 에르미타쥬와 독일인 샤빈을 위해 시인이자 작가 하인리히 하이네(Hienrich Heine, 독일 태생)가 몽모홍시에서 잠깐 살았다는 그 집을 보여주기로 했다. 늦은 오후의 흐리고 우중충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바깥공기를 쐬러 나온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이 또한 코비드 이후의 변화된 모습이다.
이전에는 아무리 주말이라도 동네에서 거리와 오솔길을 두발로 달리거나 걷거나 산책하는 사람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택가는 쥐 죽은 듯 고요했었다. 차라리 그들은 숲으로 가서 산책을 하던지 달리던지 또는 운동을 하러 스포츠 센터로 갔었다. 그들마저 이제는 낯설지 않게 동네 산책길에서 쉽사리 마주친다. 더군다나 체면치레보다는 초면이라도 거리낌 없이 'bonjour(봉쥬르, 안녕)'하고 연대감을 표하는 것 또한 새롭게 달라진 온기를 품은 습관이고 풍습이다.
생각의 차이
프랑스 저녁 8시 통행금지는 프레데리크의 여동생 까트리오나가 르 헤베이용(le réveillon, 새해 전날 밤) 가족모임 참석을 주저하게끔 했다. 통행금지 미이행 시 적발되면 벌금을 지불해야 한다.
그녀는 "모임을 위해 내 벌금을 가족들이 분담해줄 수 있냐?"라고 했단다. 그의 남동생은 즉각 싫다고 답했으며, 이어서 프레드리크 자신도 못 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던 나는 "오, 참으로 까트리오나 다운 제안이다"라고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이 짧은 이야기를 들은 나와 내 남편의 생각과 감정은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유사한 것 같으면서도 큰 해석의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녀를 비웃으며 이기적이라 여겼다. 왜냐하면 그녀가 큰 부자는 아니지만 그의 남동생보다 가난하지도 않고 오히려 아주 넉넉한 편이다. 그런 그녀가 벌금을 가족들과 분담하자고 안건을 냈다는 점에서 나는 그 발언을 부정적 관점으로 접근했다.
물론, 내가 그녀를 잘 안다고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인심 좋은 너그러운 여성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따라서 내 선입견으로 내린 편협적인 단순한 판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내 남편 생각은 까트리오나가 벌금이 아니라 규칙을 어기는 자체의 두려움이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벌금형이라는 처벌의 윤리적 책임, 즉 규칙을 벗어난 자신의 도덕적 행위 자체가 내포된 마음. 그 껄끄러움과 염려를 형제들과 나누어 가지고 싶었던 것이라고 해석한다.
내 생각은 표면적 시각으로써 그녀의 보편적 이기성을 고발하는 식이라면, 내 남편은 사건의 실상을 분석하여 그 이면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한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악감정을 섞어 비난하고 싶은 표현이 바탕에 깔려있었다면, 남편은 그 비난이 빠진 철학적 표현이었다.
내가 돈이라는 물질적인 것에 연결을 시켰다면, 그는 그마저 제외시킨 것이리라.
같은 말이라도 이렇게 듣는 사람에 따라 그 견해나 해석, 판단, 관점과 가치가 다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짤막한 대화 속에서 순간, 내 속 좁은 견지의 미천하고 초라한 생각이 들킨 것 같아 살짝 부끄러웠다. 새해에는 넓은 시각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세상을 바라보는 도량을 보다 더 넓고 깊게 만들어 보자고 새삼 다짐한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