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곤에서
이월의 첫날, 라디오에서 미얀마(버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한다. 쿠데타는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 산 수 치 국가 고문을 감금하고 1년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고도 한다.
나는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2009년 여행으로 갔던 미얀마(버마)의 첫인상과 아울러 그때 보고 느낀 경험에 따라 사뭇 엇갈렸던 희비 애환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언젠가 꼭 다시 찾고 싶은, 내 기억 속 깊이 새겨진 여행지들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하다.
남편과 내가 여행을 갔던 2009년 여름의 미얀마(버마)는 2007년 군부에 맞선 반정부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던 그 잔해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의 여파로 서방 나라에서는 여행 위험 국가로 칭하여 방문을 기피하던 현상과 더불어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긴 미얀마(버마)의 경제는 물론 국민들 삶도 궁핍해져 있었다. 간혹 우리 같은 이들의 발걸음이 있기는 했지만 소수에 불과해 전반적으로 조용했다.
2007년 반정부 시위 당시, 프랑스 매스컴에서도 시위에 나선 승려들의 행렬 모습을 비롯해 군인, 경찰의 강경 대응과 체류탄 및 공포탄 동원 그리고 시위대의 사망 소식 등을 전했다. 그로 인하여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안전에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군부 독재 경제를 배 불리는 여행은 자중해야 한다는 분위기와 반면, 여행객의 발길마저 끊긴 탓에 서민들 삶은 더욱 어렵고 피폐하므로 가는 게 그들을 돕는 방법이다는 상반된 논의가 2009년까지도 계속 일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여행의 자제보다는 두 번째 의견을 수렴하여, 여행비자를 만들었고, 드디어 2009년 여름 태국 방콕을 거쳐 미얀마(버마)의 이전 수도 양곤에 도착했다. 2005년도 미얀마(버마)가 수도를 네피도로 옮겼다고는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양곤이 제1 도시로써 수도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양곤 국제공항의 모습부터가 내게는 큰 충격으로 와 닿았다. 착륙 직전 공중에서 본 공항은 숲에 쌓여 조용히 숨어있는 아담한 작은 가내공업처럼 그 규모가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나는 거기서 느닷없이 북한의 평양 공항을 떠올려 가슴 한쪽이 울컥하며 붉어지는 눈시울을 느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북한을 왜 하필 그 순간에 떠 올렸는지는 내가 생각해도 참 아이러니하지만, 어쩜 독재 군정의, 그만큼 폐쇄된 가난한 국가라는 공통점에서 연민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며칠 후 양곤 공항에 대한 나의 두 번째 인상은 우리가 양곤 여행을 마치고 만달레이 가는 국내선을 타러 공항을 되찾았을 때였다. 우선 여행가방을 싣기 위해 무게를 재는데, 우리나라 60년, 70년대 내 어린 시절 고물상이나 방앗간에서 어렴풋이 본 듯도 한, 돼지나 쌀포대 등을 올려놓고 무게를 달았던 쇠 덩어리 저울 그 비슷한, 둔탁하고 칠이 벗겨진 낡은 기계 위에다 수동으로 서투르게 올려놓고서 재는 것이다. 나는 골동품을 보는 듯 신기하기도 했지만, 흡사 먼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도 같아 얼떨떨했었다. 또 가슴 한 편의 암울한 심정은 참으로 웃지 못할 미개국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함께 들었다.
첫날,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양곤 시내로 들어가던 중, 바깥의 놀라운 풍경을 목격하면서 나는 그 기이한 아름다움에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마치 불교의 극락 길을 연상게도 하는 붉은 가사를 두른 젊은 승려들이 길가에서 기다랗게 줄지어 탁발 수행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마치 짙은 사프란 꽃들이 피어난 들판을 따라 이상한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열린 자동차 창문으로 들어오는 습한 더위와 함께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기로운 재스민은 내 미얀마(버마)의 인상에 대한 첫 냄새였다. 그 이후 내가 미얀마(버마)를 여행하는 동안 줄곧 성스러운 곳곳에서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따라서 나에게 재스민은 미얀마(버마)인들의 불심을 떠올리게 하는 꽃이고 향기다.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의 장엄하고도 엄숙하며 웅장하면서 우아한 곡선의 아름다움에는 굳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녹색 지붕에 온통 황금색으로 뒤덮인 파고다는 그야말로 미얀마(버마)를 잘 상징해주듯이 열대성 녹음 아래 활짝 벌어진 사프란 꽃술들이 쏟아져 나온 듯했다.
수없이 많은 불교사원들, 그 웅장함과 화려함은 눈이 부실 정도이며 동시에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그곳에는 어김없이 강한 믿음으로 재스민 꽃을 바치는 미얀마(버마)인들의 순수한 불성에 대한 열정과 자비심이 함께하기에 더욱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이것은 필시 양곤만이 아니라 미얀마(버마)의 마지막 왕조였던 콘바웅 왕조시대의 수도 만달레이에서도 그리고 천 년 전 고대 왕국의 수도였던 바간에서도 나는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양곤 시내를 둘러보면서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영국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이국적인 건축물들, 이제는 노후되어 매우 허름해진 건물의 벽마다 우기철에 쏟아져 내린 빗물로 줄줄 새까만 땟물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었다. 그곳에서 자라난 파란 이끼들, 그 강한 생명력 또한 미얀마(버마)인들의 삶을 엿보는 것도 같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된 이후로는 페인트칠은커녕 손길 한 번 닿지 않은 찌든 가난의 모습. 그런 내 우울한 마음을 뒤로하고 그 풍경에서 남편은 오히려 깊고 그윽한 운치와 인간적, 서민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 본 가이드 책에 따르면, 양곤 시내에서 밤길을 걸을 때는 발이 보도에 빠져 삐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정보가 그릇되지 않는 것은, 한낮이라도 인도에서 위를 보며 걷다가는 자칫 이 빠진 보도블록에 발이 빠질 수가 있어 항시 발 밑을 보면서 걷거나 껑충껑충 건너뛰어야 했다. 딱하게도 마음 놓고 위를 올려볼 겨를이 없어 제대로 시내 풍경을 눈에 담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미얀마(버마)의 양곤을 시작으로 만달레이, 바간을 거치는 약 10일간의 짧은 여행이지만 그동안 보고 겪은 바에 의하면 국민 대부분의 종교가 불교인 나라답게 이토록 멋지고 훌륭한 불교 유적과 문화유산을 가진 나라가 어디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결코 흔치 않다는 점이다. 더불어 국민들의 인성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 정도 어질고 순박할 뿐 아니라, 믿음에 대한 그들의 행실과 순수함은 참으로 고귀하고도 아름답다고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군정 체제의 독재국가라는 안타까움과 가난한 국민들의 삶에서 희비를 엇갈리게도 했다.
한 번은 양곤 시내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그 넓은 공간 안에 손님이라고는 우리를 포함해 고작 두 팀이 전부였다. 물론 좀 늦은 점심시간이라지만 그만큼 여행객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가 식당으로 들어서자 카운터에 모여있던 종업원들이 일동 눈썹을 살짝 추켜올려 의아한 눈빛으로 이방인 우리를 바라보았다. 평생 외국인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처럼.
이어서 우리는 들어가도 되느냐 묻고, 의자에 자리를 잡자 서너 명의 젊은 종업원이 한꺼번에 다가와 주문을 요청했다. 물론 아무런 말도 언어도 통할수는 없었다. 당연히 손짓 발짓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책자에 적혀있는 것 중 아무것이나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내내 수시로 번갈아가며 다가와 안 통하는 말을 친절로써 소통하고 있었다. 시키지도 않은 물을 갖다 주기도, 우리의 접시가 비었는지 알아보기도... 때로는 호기심으로 우리 탁자 주위를 뱅뱅 돌면서 신기한 눈빛으로 곁눈 짓을 하거나 쳐다보았다. 그로 인해 신경이 거슬린 우리는 밥 먹는데 다소 자유롭지가 않았지만, 그들의 때 묻지 않고 순수한 표정 어린 호기심이란 걸 익히 알고 있으므로 거부감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역으로 나 역시 그들의 악의 없이 천진난만한 표정과 행동에 흥미가 발동하기도, 또 먼 옛날 외국인을 보며 끌리던 내 아련한 어린 시절이 생각나기도 했다.
지금도 우리는 그때 그 식당을 떠올리면, 손님보다 종업원이 더 많았다는 기억으로 인식된다.
그 이후, 2016년 발생한 지진으로 바간의 몇몇 파고다가 파괴되고 훼손됐다는 뉴스를 들을 적에도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는데, 이번 미얀마 군부 쿠데타 소식을 들으면서 2007년 티브이에서 보여주던 반정부 시위와 항의하던 장면을 떠 올리는가 하며, 특히나 과거로의 회귀처럼 2009년 그 멋진 미얀마(버마) 여행을 되새겨보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내가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 와중에 곁에 있던 남편이 "부모님 댁에 1980년 여행 당시 찍은 비디오가 있으니 다음 기회에 그걸 빌러 보자"라고 한다.
부디, 미얀마(버마)에도 한국처럼 민주화의 봄이 오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2009년 당시에 조만간 다시 오자 했었지만 벌써 11년이 넘도록 가지 못한 바간의 그 호텔에서 다시금 묵을 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