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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수없능 Nov 01. 2023

이게 맞아?

프롤로그_한 회사에서 두 번째 퇴사를 했다.

햇수로 5년간 지역신문에서 기자로 일을 하고, 정말 쉬고 싶어서 퇴사를 했다. 서류상 아르바이트로 단기 고용이 된 거지만, 퇴사를 해도 신문발행 편집을 위해 주에 이틀 이상은 출근을 해야 했다. 그냥 출퇴근 시간이 정해지지 않았을 뿐 원래 하던 일의 연장이었다. 이 일에 대해 환멸감을 느끼고 도망치듯 다른 회사에 냉큼 취직을 결정했다.  




지역신문은 일인 체계로 운영하는 회사도 많이 있지만 내가 다녔던 회사는 나름 지역에서 20년 넘게 버틴 터줏대감 같은 회사로 당시 직원이 4~5명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처음에 정신이 없어서 몰랐지만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정해진 하루 루틴이 생겼고, 일과를 소화하면서 그날, 그날 발생하는 이벤트(행사 등 각종 취재, 민원성 재보) 같은 일거리도 소화해 하루에 8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을 일해도 부족한 일상을 지냈다. 그만큼 정해진 규칙도 많았고 해야 할 일도 많았다(모든 곳이 이렇게 운영되지는 않는다. 그냥 내가 다녔던 곳이 지독했을 뿐).


pixabay


처음 입사를 했을 때, 기자일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대외활동도 기자로 활동했고, 대학 전공도 사진을 전공하다가 미디어콘텐츠학과로 편입할 만큼 언론 혹은 광고일을 하고 싶었다. 언론고시를 생각하고 있던 찰나 아는 분을 통해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역신문 특성상 공개적으로 구직을 하지 않아서 티오가 있어도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지역 단체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분의 추천으로 면접을 진행했고, 출근일자까지 단숨에 정해졌다. 지역신문에서 열심히 활동하면 중앙지로 진출하는 경우도 더러 있고, 실제로 내가 있던 신문사에서도 이름만 말하면 다 아는 일간지로 스카우트되어 간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바로 출근하겠다고 대답했다.


처음엔 정말 힘들었지만 그 힘든 것도 재밌을 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을 했던 것 같다. 어떻게 잊겠는가. 내 이름으로 첫 기사가 올라가고, 포털에 검색되는 순간을. 첫 인터뷰를 잡았을 때 그 떨림. 그리고 인터뷰 기사를 처음 올렸을 때. 사건사고현장을 포착했을 때 기사를 써야겠다는 생각과 피해자들의 참담했던 표정을 보며 갈등했던 순간. 내가 쓴 기획 기사가 처음 1면 톱기사가 되었을 때. 이런 순간들은 잊을 수 없지만 그만큼 내 몸은 정말 많이 망가졌다. 거짓말 안 하고 6개월 사이에 내 몸무게의 2배까지 찍었을 정도로 몸이 망가져도 일이 좋았다. 


많이 먹어서 그런 거라면 스트레스 때문에 먹어서 그렇겠거니 하겠지만 입사 후 첫 해 1년은 마음 편히 4시간 이상을 자본적이 없다. 자정에 퇴근하면 그날은 정말 빨리 퇴근한 날이고, 늦게 퇴근하면 새벽 5시에도 퇴근해서 아침 8시 반까지 출근해야 하는 일상을 보냈다. 정말 업무강도 최상. 밥은 하루에 한 끼 재시간에 챙겨 먹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담배는 안 하지만 주 1회 이상은 폭음은 꼭, 한 달에 주말을 챙겨본 게 최대 많은 게 이틀이었나. 봄가을 행사철에는 정시출근만 하지 않았을 뿐 한 달에 1일 주말 챙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새벽 5시에 있는 행사 취재가 있으면 더더욱 수면시간은 줄어들었다.


갓 대학 졸업해서 사회생활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햇병아리는 이런 부당함에 굴하지 않고 열정페이를 쏟아부었다. 최저임금 언저리에 그나마 주유비 지급으로 근근이 버텨내고 있었다. 그러다 2년 반 정도 지났을 무렵 소위말에 현타가 제대로 왔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몰랐고 그냥 하루 살기 바빠 개인적인 목표나 하고 싶은 일도 잊고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정처 없이 떠돌던 무렵, 그만둔 지 반년만에 당시 편집국장님께 연락이 와서 영상파트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니 총괄을 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기존의 기사업무는 조금 있겠지만 영상이 주 업무가 될 거다라는 말로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설득하셨고, 결국 수락을 하게 되었다. 


회사와 관련 없는 주변사람들은 열이면 열 드디어 정신이 나갔다고 욕을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암튼 어찌어찌 수락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같은 업무에, 일의 강도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주말근무가 줄어들었고, 새벽퇴근이 저녁 10시 이전에 퇴근하는 걸로 바뀐 정도였다. 생긴다던 영상파트는 그냥 무산이 되었다. 이렇게 2년 반이 또 지났다.


두 번째 퇴사를 결정했던 건 제21대 총선즈음이었다. 예비후보들이 선거운동을 하고 당의 공천발표가 다가올 무렵쯤 심하게 앓아누운 적이 있다. 정말 팔과 다리가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들 정도 심하게 아픈 토요일(잊히지도 않는다)이었다. 그 전날 중요한 일정이 잡혀있어서 몇 시까지 어디로 오라는 당부를 몇 번이고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 장소를 나가기 위해 앞도 제대로 안 보일 만큼 아픈 몸상태로 도착을 했는데 도착을 하니 그 일정이 취소되었다고 뒤늦게 알려주더라.


도저히 내 차를 운전할 기운이 없어서 현장에 있던 친한 사람이 집까지 데려다주고 그날 부모님과 응급실을 갔다가 집에 와서 기절했던 게 생각이 난다. 눈물이 나고, 서운하고 서글펐다. 악착같이 일한 결과는 "힘들지, 조금 쉬어도 괜찮아"이런 위로의 말이 아니라 "그것 밖에 못해?(대략 이런 뉘앙스였다)"라는 말이었다. 환멸이 제대로 났던 것 같다. 그래서 선거가 완전히 끝난 뒤 같은 회사에서 두 번째 퇴사를 했다. 


퇴사 후,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었다. '일에서 벗어나는 건 역시 떠나는 게 최고지!'라는 생각에 퇴직금을 받으면 해보고 싶은 것들을 리스트화하면서 단기 어학연수도 알아봤었다. 퇴직금 나올 날만 기다릴 무렵 회사 사정으로 인해 퇴직금 지급일자가 밀리고, 코로나에 개인적으로 금전적인 문제도 터지면서 계획이 붕 뜬 상태였는데 아르바이트를 제안에 그동안 해왔던 일의 일부 편집업무와 사무보조를 반년정도 하다가 원하는 연봉 맞춰줄테니 그냥 같이 일하자는 제안도 거절하고 도망치듯 두 번째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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