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승무원 일기

9월 4일

by 꿈꾸는 앵두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다시 승선하면서 다짐한 것이 있다. 게을러지지 않을 것.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한 것이 어느 것에 적응하기 시작하면 이내 게을러진다. 물론 나만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나의 약한 의지력 때문이 아니라 이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해보지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의지력이 강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내가 원하는 것(게을러지지 않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잘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의지력 문제겠지. 오늘 승무원 긴급대피훈련을 하는데(참고로 승무원 긴급대피훈련은 1주일에 한 번은 꼭 하게 되어 있다. 승객들과 하는 훈련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고, 사실 내가 화재 진압이나 응급 팀이 아닌 이상은 선체가 안전해질 때까지, 혹은 선장이 하선명령을 내려 구명정, 구명보트를 타기 전까지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고로 생각할 시간이 많다. 하하.) 문득 게을러지지 말아야지 하고 지겨운 다짐을 또 해 보았다. 그러면서 지난 크루즈 때에는 노트북을 가지고 승선하지 않아 핸드폰에 하루하루 기록을 했다면, 이제는 공식적인 곳에 올리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일과로 정하고 부지런히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야 나는 좀 스스로 뭔가를 하게 되더라고. 물론 기록을 위해서는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지난 크루즈 때에 적어 놓은 길고 짧은 100여개의 파일은 처음 몇 개의 파일만을 들여다 보았을 뿐 아직까지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놈의 게으름이란..

싱가폴 승선 날, 자정 비행기를 타고 아침에 도착해서 유니폼만 갈아입고 밤까지 일 하였다. 졸려…. 그 다음날부터는 서류가 완전 많았던 미얀마 기항을 준비하느라 매일을 거의 자정까지 일 했고, 쉬는 시간에는 잠만 자고, 밤에 자고 일어나도 개운하지도 않은 생활을 쭉 했다. 그리고 사실 오늘까지도. 이제 겨우 몸이 회복되려고 하니 갑자기 승선하고 나서 알쓸신잡 프로그램에 빠져 그것을 본 기억만 나지 계획했던 영화 100번 보기의 일환으로 다운받아온 영화는 2번이나 봤으려나? 받아온 일본어 파일도 이제야 열어보고. 그렇게 오늘 갑자기 반성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쓰는 이 글은 그 시작과 나의 다짐이다. 물론 언제까지 지속할 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 보려고. 시작이 반이니까.

한 번 지구 한 바퀴 돌아봤다고 모든 것이 익숙하게만 느껴진다. 참 사람 간사하지. 아님 나만 간사한 걸까. 특히나 며칠 전 다시 찾은 콜롬보에서는 툭툭(4발 달린 오토바이택시?) 택시 운전 기사들이 두렵지 않았다. 나는 현지통화도 가지고 있었고, 미터로만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멀리 가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크루즈 생활도 마찬가지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익숙한 생활. 크루 메스(승무원 식당을 메스라고 부른다. Mess) 의 음식도 이제는 기대도 실망도 할 것이 없고, 긴급대피훈련도, 업무도, 일상도 비슷비슷 하게만 느껴진다. 어제 저녁에는 지난 크루즈 때에 했던 패션쇼 기획에 또 있었다. 가볼까 말까 망설였는데 이럴 때는 해 보는 게 좋음. 혹시나 해서 올라가 보았는데, 지난 번과는 다른 분위기로, 한 명 한 명 패션소를 하고 있었다. 재미도 있었고 중간중간 한복을 입은 승객을 찾는 것도 재미 중 하나였다.

익숙한 생활이기에 하루 하루가 조금은 지루하다. 수에즈운하를 건너고 유럽에 다다를 때까지 약 2주간 항해를 하기도 하고, 더구나 지금은 해적출몰지역을 지나는 중이라 창문이란 창문은 다 막아 놓아서 더 답답하기도. 하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유럽을 갈 터이고, 오로라도 볼 것이고, 뉴욕도 갈 것이니 기다려야지. 적당히 바쁜 하루하루들. 그리고 곧 결제하는 바쁜 날도 다가오니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지루한 이 시간이 지나는 동안 받아온 동영상을 부지런히 보고, 가져온 책들도 부지런히 읽어야지. 오늘은 히든피겨스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딱 내 취향이다. 불과 50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에서의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 낮잠을 자지도 않고, 쉬는 시간을 쪼개어 본 영화. 이런 게 일상의 재미라고 할까.. 하하..

오늘 저녁에는 파티가 있었다. 이 작은 배도 여러 회사로 쪼개어져 있는데 그 핵심(?)이라고 알려진 내가 속한 회사에서 주최하는 파티이다. 오후 9시 30분부터 시작이라 저녁을 먹을까 말까 고민했는데, 좋아하는 양고기 꼬치가 있길래 저녁으로 대신했다. 무료 와인, 맥주, 음료 등이 준비되고, 미고랭, 김밥, 후라이드치킨, 치즈 등의 음식이 준비 된다. 배가 불렀지만, 저녁 따위는 먹은 적이 없다는 듯이 또 그렇게 음식을 먹어 댄다. 난 참 식성 하다는 좋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면서. 치즈도 있길래 와인도 좀 마셨다. 이내 피곤해져서 캐빈으로 돌아왔다. 인터넷을 좀 하려고 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랄까 이렇게 다짐한 날에는 인터넷연결이 되지 않는다. 아.. 상상이나 해 보았나. 인터넷 연결 안되는 지역이라. 거기에 더해져 배까지 조금 흔들린다. 배의 흔들림은 이미 적응이 되서 리듬까지 타는 정도가 되었다. 오늘은 인터넷은 틀렸으니 읽던 책이나 마저 읽고 자야겠다. 끝이 보여간다. #남궁인 선생님의 #만약은없다. 너무 사실 적이라 나의 상상력이 현실감을 더하는 책. 하필 자기 전에 읽는 책이라 꿈에 나올까 무섭긴 해도 좋구나. 내일은 #곤란한결혼 을 시작했으면 하는 바램.

안녕. 모두 굳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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